인도네시아 수카르노공항에서 19㎞ 밖에 떨어지지 않은 호텔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한시간반. 퇴근시간이 겹친 트래픽 잼(교통체증)은 지독했다.
1,200만명이 산다는 자카르타의 교통 인프라가 워낙 형편없는 데다 차는 갈수록 늘어 도로사정은 최악이었다. 올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6.5%라는 인도네시아는 2~3년 내 100만대 신차시장이 된단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 제조업체의 A대표는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이 36%였다”며 “내년에는 더 올라갈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부가가치가 낮은 한국 진출기업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 상승은 적신호다. 하지만 근로자 임금이 올라가면 내수시장은 활기를 띤다. 실제로 자카르타 곳곳의 대형 쇼핑몰은 손님들로 북새통이었다. 인건비가 올라도 A대표의 표정이 밝았던 이유도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이 날로 커지면서 매출이 순풍을 달았기 때문이다.
근로자 임금은 양날의 칼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이 싸야 더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근로자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야 소비가 팽팽 돌아간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이 1가구 1차량 시대를 연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근로자 월급이 크게 오른 덕이다. 인건비 따먹기 재미가 쏠쏠했던 제조업체들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눈을 흘기며 엑소더스를 벌이는 동안 한국 근로자들은 자가용을 샀다.
새삼 다 아는 얘기를 늘어놓는 건 대한민국이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근인(根因)을 정치권과 정부ㆍ대기업ㆍ귀족노조가 외면하고 있어서다. 정부와 정치권은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대외의존형 경제구조를 탓하면서 서비스업을 육성해 내수시장을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한가한 공자말씀이다.
국민이 돈써야 내수 살아
서비스가 좋아진다고 가난뱅이가 없는 돈을 쓰는가. 의원직과 고위 공무원 자리 걸고 외국인을 유인하도록 서비스업 규제부터 확 풀든지… .
내수시장에서 콧노래가 나오려면 국민들이 돈을 써야 한다. 경제위기 때마다 정치권과 정부는 건설ㆍ토목 부문부터 돈을 풀었고 건방을 떨며 대기업에 투자하라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결과는 보시다시피다. 가난한 국민들은 좀처럼 주머니를 열지 못했다. 빚갚기도 바쁜데… .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껑충 올려놓은 집값은 수년 전부터 곤두박질쳐 역(逆)자산효과의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집값폭등 때문에 1,000조원으로 불어난 가계부채는 내수시장, 아니 한국 경제에 핵폭탄이다. 이게 정녕 소위 서민, 민중을 위한다는 진보세력이 한 짓인가. 시대착오적 ‘747(7% 성장, 4만달러 소득, 7대 강국)’정책을 내걸다 슬그머니 짝퉁 진보가 돼 술집 작부 같은 천박함을 드러낸 현 정권 역시 오십보 백보다.
파열음을 내고 있는 부동산 거품도 문제지만 중환자실의 내수시장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건 국민들이 가난해도 너무 가난해져서다. 표에 혈안이 된 정치꾼들은 부자와 재벌, 대기업 탓이라며 종주먹을 들이대지만 그건 선동이다. 비정규직 3등 국민이 늘어난 채 줄지 않는 ‘한국의 빈곤화’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요소투입형 경제인 인도네시아는 성장률이 높을수록 중산층이 두터워질 수 있다. 반면 지식집약형 한국 경제는 성장률이 6%대(2010년)을 기록해도 고용은 안 늘고 국민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철옹성 귀족노조가 초고임금에 희희낙락하고 대기업들이 공장을 해외에 연신 짓는 동안 저임금 비정규직 근로자 총수는 1,000만명 가까이 늘어났다.
비정규직 문제 못 풀면 누구든 필패
근로자는 소비자다. 임금이 싸다고 좋은 게 아니다. 싼 게 비지떡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 노 전 대통령의 지난 15년은 신자유주의가 어떤 참혹한 결과를 낳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이 세 대통령은 한국을 초고임금 정규직 아버지와 저임금 비정규직 아들의 분열된 사회(divided society)로 고착화시켰다.
오는 2013년 2월 어떤 신임 대통령도 혹세무민(惑世誣民) 경제민주화, 출발부터 틀려먹은 표(票)퓰리즘 복지만 외치다간 한국민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고갈 것이다. 공약만 놓고 보면 박근혜, 문재인 후보 둘 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관건은 대통령이 누구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다. 다시 5년을 허비하기에는 영화 ‘26년’의 간절한 외침처럼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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