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 영화나 각종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갑작스레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 그간 여러 이유로 해보지 않았던 일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다소 황당해 보이는 일까지. ‘사는 게 바빠서’ 미뤘지만 이제 진짜 끝이니까, 더는 미루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만큼 남의 눈치를 보느라 혹은 더 먼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즐거움을 유예해온 일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tvN이 새롭게 선보이는 드라마 ‘두번째 스무살’의 주인공 최지우 역시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최지우는 드라마 초반에 췌장암 진단을 받고 살날이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자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 중 하나가 못해본 대학생활 하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진이었음이 밝혀지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경험은 그에게 주어진 인생을 더 열심히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 그의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남편은 계속해서 이혼을 요구하고 있고 아들 역시 엄마에게 냉랭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 끝’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경험 하나만으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흔적’을 남기려 애쓰는 것은 아닐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절망하기 보다는 알차게 채우겠다는 다짐, 후회 없는 삶의 마무리를 원하는 것은 내 ‘마지막 흔적’이 초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마지막 흔적’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어떤 모습일 수도 있고 본인의 인생을 문서로 남기는 자서전 일수도 있다. 같은 맥락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괴로움을 못 이겨 스스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비슷한 양상이 발견된다. ‘흔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탄압한 상대방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 또는 절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어쨌든 이들 역시 상대방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말의 가책이라도 느끼기를 바라며 그들의 악행을 죽음으로써 세상에 알리려 한다. 종종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향한 것일 때도 있다.
‘내일’은 희망을 상징함과 동시에 불안을 야기하는 존재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하기 싫은 일도 참아낸다는 건 분명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내일을 위해 너무 많은 오늘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자문해 봐야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야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큼만 정말 내가 살고 싶었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너무 서글프니까. 언제고 인생은 끝이 나기 마련이지만 정해진 마감일에 맞춰 하고 싶었던 일들을 그제서야 욱여 넣는 건 분명 안타까움과 후회를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현재를 살아라’라는 격언이 한때의 즐거움만을 위해 유흥에 매진하라는 뜻은 아니다. 이번 주말 진지하게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내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것을 권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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