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갑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백화점 직원을 무릎 꿇린 고객, 아파트 주민의 경비 직원에 대한 횡포, 교수의 성추문 등 권력과 자본을 가진 사람이 악인처럼 비화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특히 모바일 기술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사건 사고가 실시간으로 제보되고 전국에 퍼지고 있습니다. 갑질이 뉴스로 보도될 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이후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생기면 책임자나 리더가 ‘장고’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먼저 사과하는 게 답이라는 상식이 공유된 탓인지 일단 ‘죄송하다’는 말부터 합니다. 그러나 여론은 잦아들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하고 있는 사과는 크게 차별화되기 어렵기 때문이죠. 때때로 그 가치와 진의가 의심받기도 합니다. 사과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표현과 방식이 종종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체성, 정확성의 결핍, 상대방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수사 등이 도마 위에 오릅니다. 처신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왜 자꾸만 갑질 이야기가 언론을 장식하고,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걸까요. 인간은 옳지 못한 행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전략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혹독한 시선을 예상치 못하고 자기 위주로 상황을 바라보려는 당사자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힘과 네트워크로 충분히 현실을 덮을 수 있다는 생각, 자기만은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함이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어제는 상대방의 갑질을 비난했지만 오늘은 자신의 갑질이 비판받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20세기적 인간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날리면서 ‘리좀’적 세계를 말했습니다. 그는 위계질서와 투입-산출이 명확한 통제 시스템이 아니라, 모든 상황과 맥락이 시작과 끝이 없이 통하는 복잡한 세계를 ‘리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매일 변합니다. 그리고 어제는 옳았던 것이 오늘과 내일에는 옳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리좀이라는 ‘부드러운 공간’(Smooth space)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상대화와 객관화가 필요합니다. 내가 상상한 답과 과정이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죠. 철학자들은 이미 80년대부터 경고했던 것을, 2015년의 의사결정자들이 체험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한순간의 말실수와 감정 표현이 10분 안에 집단적인 의분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리더들은 자기의 경험이 갖는 가치를 소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좀 겪어봐서 안다’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 렌즈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은 철저히 풋내기의 그것으로 비화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그만큼 경계 바깥의 삶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개방적인 사람, 관용적인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시대에 뒤처진 사람, 답답한 사람이 됩니다. 본인에게 물으면 극구 부인하겠지만 남들이 봤을 때는 ‘꼰대’가 되고 마는 것이죠. 갑질은 30대의 젊은 경영자와 70대의 부유한 아파트 주민을 똑같은 꼰대로 만듭니다. 몇 살이냐가 아니라 본인의 말과 행동을 상대화할 수 없느냐 여부가 기준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행동을 곱씹는 습관입니다. 아니면 그저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만 참고한다고 해도 상당 부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갑질’ 본능이 발동할 때 자신에 대한 시선쯤은 고려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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