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영'에 사활을 건 전세계 다국적기업들이 뼛속부터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사내에서 쓰는 언어까지 앞다퉈 바꾸고 있다. 해외진출이 가속되면서 다른 나라 기업이나 시장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자국어 대신 국제 비즈니스계에서 사실상 공용어로 쓰이는 영어로 의사소통 수단을 통일함으로써 경영효율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내수위축을 해외시장 진출로 상쇄하려는 일본 기업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혼다자동차는 지난해 11월 모든 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며 타이어 생산업체인 브리지스톤도 지난해 10월 영어를 사내 공용어로 채택했다. 일본 최대 제약업체인 다케다는 이사회 내 외국인이 단 2명임에도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 최대 온라인 유통업체인 라쿠텐은 한발 더 나아가 사적인 내용을 제외한 직원들 간의 대화에도 영어를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토익점수가 낮은 직원은 승진에서도 불이익을 받는다. 이 외에 도요타·닛산 등 자동차 업체는 물론 중장비 업체와 주류 업체들도 사내 영어사용에 동참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몸집이 급속도로 불어난 중국 기업들도 최근 해외진출을 가속화하며 사내 영어사용을 늘리고 있다. 세계 최대 PC 생산 업체인 레노버가 중국어 대신 영어를 사내 공용어로 채택한 데 이어 최근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도 이에 동참했다.
이 외에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서유럽 기업들 사이에서도 영어 열풍이 거세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독일 자동차 업체 아우디는 영어실력이 부족한 직원들의 승진을 제약하고 있으며 항공 업체 루푸트한자는 고위직 임원 50명이 독일인임에도 지난 2011년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다. 이 밖에 프랑스에 본부를 둔 에어버스, 핀란드의 노키아, 덴마크 거대 해운기업 AP몰러머스크 등도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영어를 사내에서 통용함으로써 해외시장 진출은 물론 글로벌 인수합병(M&A) 후의 원활한 경영과 세계적으로 유능한 인재확보에서도 이득을 보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다국적기업들이 영어능력을 중시하는 가운데 영어로 미묘한 감정 차이까지 전달하는 인재가 드물어 국제 비즈니스계에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지는 전했다.
사실 영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 공용어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로 내수에 역량을 쏟아온 일본과 중국 기업들이 속속 해외로 눈을 돌리고 유럽 기업들의 해외교류가 급증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영어의 입지는 더욱 굳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 세계에서 영어 외에 공용어로 채택할 마땅한 언어가 없다는 점도 주요인이 됐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사용인구가 많은 중국어가 대안이 될 수도 있으나 중국 내에서도 4억명이 표준어를 쓰지 않는 등 배우기가 까다롭고 중국어의 키보드 입력이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면서 국제 비즈니스계에서 영어에 대한 의존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다국적기업들의 영어 공용화가 늘면서 부작용도 불거지고 있다. 영어 사용을 강요받는 직원들의 반발이 늘고 있는데다 직원들 간 소통단절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경영진이 무조건 영어사용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영어학습비를 지원하고 근무 중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등 사내 영어사용을 활성화하기 위한 과도기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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