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산수자연을 즐기는 3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접 산과 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뜰과 화초로 대자연의 일부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즐기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여의치 않을 때는 '와유(臥遊)'를 택할 수 있다. 누워서 노닌다는 뜻의 '와유'는 송(宋)나라의 종병이라는 사람이 병든 노년에 누워서 보기 위해 자신이 유람했던 곳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둔 것에서 유래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방콕(방에 콕 처박혀 있다는 뜻)'하는 것인데, 조선의 선비들은 와유로 여행을 대신하곤 했다. 이들은 와유의 상상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그린 '와유첩'을 비롯해 기행문, 돌로 만든 인공 산인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 두고 와유를 즐겼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7번 째 교양총서인 이 책은 조선의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여행다녔는 지를 그림과 기록들로 들여다보고 있다.
조선인의 여행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여행과 자못 다른 의미도 있었다. 사도세자의 온천여행은 다리에 난 병을 치료한다는 표면적 이유가 있었지만 실상은 아버지 영조의 정치적 시험무대였다. 당시 사도세자의 행차는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확인하는 장이기도 했으며,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민심의 향배를 수시로 보고받았다.
그런가 하면 조선 여성들의 여행은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 법에 대항하는 일이었다. 조선 후기의 거상(巨商)으로 성공한 기생 출신의 만덕은 흉년이 든 제주를 구휼한 공로로 정조가 소원을 묻자 "금강산 유람"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신대손(申大孫)의 부인인 의유당 남씨는 동해의 일출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에 "관청의 기생들이 꼭 봐야할 장관"이라며 "마음의 병을 고쳐준다고 생각하라"는 등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기도 했다.
관직을 따라가는 양반 남성들의 여행길도 다채롭다. 과거 합격을 위해 노력했던 노상추의 과거길은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길 위의 고단한 삶으로 그려졌다. '암행어사의 길'은 '어사출도'처럼 드라마틱하지만은 않았으며 고난의 길이자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
귀양을 떠나는 길을 죽음을 겨우 비껴간 불행의 길로 보지 않고 여행의 하나로 본 시각도 있었다. 을사사화에 연루돼 경북 성주로 유배간 이문건은 지방 관리들의 배려 속에서 즐거운 유람을 떠났다.
이 외에도 예인들의 수련과 득음의 과정을 조명한 '음악 여행', 오늘날의 폭력조직과도 닮았던 19세기 보부상단의 뒷이야기와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사여행', 망국의 울분을 단군의 실재를 증명하는 백두산 여행으로 극복하려 했던 최남선의 이야기 등이 함께 펼쳐진다.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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