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공간이 있다. 하나는 책상 30개로 채워 무대를 만들었다. 다른 곳은 피아노 1대만 두고 텅 비워 놓았다. 공간 사이에는 높은 벽이 드리워져 있다. 17명의 무용수는 각기 두 공간으로 나눠 들어가 춤을 춘다. 흘러 나오는 음악은 같아도 무용수의 몸짓과 느낌은 제각각. 하나는 침묵의 공간, 또 하나는 마치 동물 소리와도 같은 괴성이 가득하다.
2006년 스위스에서 초연된 모던 발레'헤테로토피아'의 모습이다. 헤테로토피아는'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이란 의미의 헤테로(hetero)와 장소를 뜻하는 토피아(topia)를 합한 말. 관객은 무대 가장자리에 서거나 앉아서 무용수들의 몸짓과 흐르는 땀방울, 거친 숨소리를 고스란히 느끼며 이질적 요소가 공존하는 이형의 두 공간 속에서 일정한 규칙과 질서를 발견해낸다.
이게 뭔가.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물음표가 끊임없이 따라붙는 난해한 작품.'헤테로토피아'는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64·사진)의 최신작 중 하나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안무가 피나 바우쉬(1940∼2009년)만큼 세계적 명성을 지닌 인물이다. 포사이스는 본래 고전 발레 무용수·안무가로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발레 형식을 끊임없이 부수고 확장시켜온 것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그를 혁신적·급진적 안무가로 평가한다. 2005년 그의 이름을 딴'포사이스 컴퍼니'를 창단하며 그의 예술 세계는 더욱 새롭고 실험적인 모습을 띠게 됐다. 그의 무용단'포사이스 컴퍼니'가 구현한'헤테로토피아'가 오는 14일까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내한공연을 갖는다. 포사이스는 이번 공연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됐다.
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헤테로토피아'는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에 집중된 발레"라고 소개했다.
"무용수들이 집중해 표현한 건 음악입니다. 음악을 몸짓으로 자유롭게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무용수들이 틀과 어떤 지배적 구조에 갇혀 있는 게 아닌, 그들 스스로 음악적 잠재력을 몸짓으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한 공간에서는 마치 연주회(concert)와 같은 모습이 펼쳐지고, 또 다른 공간에서는 같은 음악에 맞춰 전혀 다른 춤이 펼쳐집니다. 여러 구조가 중첩되고 있는 구조죠. 관객들이'헤테로토피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공간을 옮겨가며 감상했으면 합니다."
그가 무용에 음악을 접목해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데는 포사이스의 성장배경도 한 몫 한다. 바이올린을 공부했던 할아버지, 피아노를 했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바순, 플루트,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다. 더불어 대중 음악도 두루 접하며 자랐다. 덕분에"바흐의 음악에도 펑크가 느껴질 때가 있다"며 재치 있는 유머를 건네기도 한 그는 음악처럼 앞으로의 발레 작품에서도 "여러 가지가 부딪히고 중첩되는 발레 무대를 선보이고 싶다"고 했다.
포사이스는 다소 난해한 모던 발레'헤테로토피아'에 담긴 궁극적인 메시지는 없다고 했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작업하진 않는다"는 게 그의 변(辯)이다.
"저는 과학자가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진 않습니다. '헤테로토피아'역시 주어진 무대에서 어떻게 몸으로 다양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실험하는 하나의 과정에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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