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길을 걷다가 성곽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붕들을 만났다. 파랑이나 초록의 함석지붕도 있고 붉은빛 바래버린 기와지붕도 보였다. 행여 날아갈까 구멍 난 벽돌을 올려놓은 녀석도 있고 쓰레기를 이고 있는 놈도 있다. 보이진 않지만 빨간 플라스틱 슬리퍼나 소꿉 놀던 그릇을 이고 있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새마을운동 이전까지 우리네 집의 지붕은 대개 기와지붕 아니면 초가지붕이었다. 지역에 많이 나는 재료를 써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억새지붕이나 돌기와지붕이 있는 곳도 있었고 산간지방에서는 너와지붕이나 굴피지붕을 볼 수도 있었다. 과거의 초가지붕은 긴 볏단을 손으로 타작해 모아뒀다가 겨울이 오기 전 지난해의 짚 위에 추가로 덮었다. 초가지붕의 두께가 그 집의 역사인 셈이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전국의 초가지붕이 없애야 할 흉물 취급을 받아 긁어 내려지고 대신 슬레이트나 함석지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전국에 고속도로가 놓이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면서 고속도로변의 집들은 저마다 시멘트 주택으로 바뀌고 지붕은 하나같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박공(양쪽으로 경사진 지붕)에다 원색으로 치장한 모양으로 변했다. 한옥 기와지붕의 매력은 하늘로 날아갈 듯 매끈한 곡선미다. 암키와와 수키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으로 누워 있고 막새기와가 기와 끝의 마감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가운데가 낮고 양쪽으로 가면서 높아지는 용마루와 용마루 장식은 정갈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이제는 기와지붕도 한옥마을이나 궁궐에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것이 됐다.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평평한 슬라브지붕이 도시 주택가 골목의 흔한 풍경이 됐다. 일부러 맞추지 않았어도 한 폭의 그림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던 초가지붕과 기와지붕들 대신 경제 논리에 충실한, 함께 어울리지 않는 지붕들이 우리 동네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단독주택에 사는 가구 비율이 39.6%로 1995년에 비해 20%나 줄었다. 우리나라 가구의 60%는 단독주택이 아닌 아파트나 연립주택 등에서 지붕을 의식할 일 없이 대개는 천장만 쳐다보며 살고 있는 셈이다.
건설 경기가 바닥이라지만 여전히 어디에선가 새로운 건축물이 태어나고 있다. 새로 생기는 건축물에서는 잃어버렸던 지붕들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친 날씨로부터 사람을 가려주고 주변 환경과 싸우지 않고 어울리며 보기에 아름다운 지붕이 나올 때가 됐다. 이는 건축사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건축주의 이해와 감각이 동반돼야 가능하다. 비 오는 날 가까운 한옥마을이나 시골 한옥집을 찾아 툇마루에 걸터앉아 처마지붕 밑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을 한결 수월하게 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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