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윤제균 감독이 영화 '국제시장'을 만들면서 스태프들과 표준근로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 무척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영화는 성공했지만 이면에는 저임금에 혹사당하는 스태프들의 가혹한 현실이 온존하고 있었던 셈이니 빛이 바랠 것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구설에 시달렸을 것이다. 윤 감독은 이를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스태프들과 하루에 12시간만 촬영하고, 1주일에 한 번은 쉬며, 4대 보험 혜택도 주는 파격적인 근로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바꿔놓았다. 젊은 스태프들이 월 백만원도 안 되는 보수를 받고 하루 2∼3시간씩 쪽잠을 자면서 일하는 게 예사였던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높이 평가했다.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제시장'을 관람한 후 윤 감독에게 "표준근로계약을 적용한 영화가 좋은 결과까지 얻게 돼 기쁘다"면서 "이를 계기로 표준근로계약이 모든 영화제작에 확산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윤 감독이 큰일을 해낸 셈인데 '국제시장'의 진정한 성취는 여기에 있다.
영화판에 스태프가 있다면 출판계에는 책을 기획·편집·디자인, 교정·교열하는 출판종사자들이 있다. 이들의 처우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대다수 출판사들이 직원 수 5인 미만의 영세업체여서 근로기준법의 보호도 못 받는다.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출판사도 드물어 부당해고 시비도 잦다. 노조가 있는 출판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해고된 사람이 1인 출판사를 차리면 또 다른 해고자가 그 밑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 1인 출판사를 차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럴 형편도 못되면 외주노동자(프리랜서)로 살아야 한다. 여성이 절반을 넘는데 이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2013년 외주출판노동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70%가 월 소득 150만원 이하다. 출판기관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하다. 2009년 출판노동자협의회가 발족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힘이 부쳐 보인다.
정부는 지난해 '구름빵 사건'을 계기로 저자와 출판사 간에 통용될 수 있는 7종의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저자의 권익보호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문화산업이 성공하려면 창작 인재들이 안심하고 보람되게 일할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최고"라고 했다. 출판종사자들의 처우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때가 됐다.
정부도 나서겠지만 출판인들과 영향력 있는 출판단체들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회적 현안 앞에서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인상을 줘서는 곤란하다. 요즘 출판인들을 만나면 "옛날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안 온다"고 걱정한다. 인재가 오게 하려면 그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행복한 노동이 좋은 책을 만든다. 반세기 만에 대한민국을 10대 출판강국 대열에 올려놓은 출판인들이다. 뭐는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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