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유럽에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등장했다. 그 전에도 해시계나 물시계와 같이 시간을 측정하는 정교한 기구가 있었지만, 그 동력을 기계로 대체한 것은 유럽이 처음이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카를로 M. 치폴라는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을 예고한 13세기 기계 시계의 탄생이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드는 기술 진보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출연한 시계와 대포의 상관 관계, 극소수 숙련 장인들의 이주가 국가 흥망에 미친 영향, 아시아, 특히 중국이 기계 시계를 만들지 못한 이유 등을 분석하며 근대기 기술 진보에서 유럽이 성공하고 중국이 실패한 이유를 파고 들어간다.
저자는 14세기 유럽에 닥친 흑사병으로 거대한 인구학적 재앙이 일어나 노동력이 급감했고, 유럽 문명은 더욱 기계 지향적으로 변해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힘을 기계의 힘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경제적 유인과 수공업자들이 자치를 누리는 도시의 발달은 기계 시계가 탄생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제공했다.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도시 한 가운데 설치된 거대한 공공 시계였는데, 14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공공 시계가 성당ㆍ시 청사 등 도시의 중심 시설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기계의 힘으로 인력을 대체하려는 유럽인의 관심은 다른 문명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유럽만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파악한 저자의 관심은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이 유럽에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져왔다고 설명한 전작 '대표, 범선, 제국'에서도 드러난다. '시계와 문명'에서는 기계 시계의 탄생이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면서 시계와 대표가 역사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17세기 전반에는 시계 제작의 전문화가 이뤄지며 시계 장인들은 탈진기, 도르래, 태엽, 외장 등 각각 부품을 제조하는 수공업자로 분화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화는 대단히 의미심장한데,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 구성되고 전문화된 직공의 손을 거친 대량 생산 시계는 산업 혁명으로 가는 길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기계 시계를 만들지 못했을까. 저자는 중국의 가치 체계가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하고 억압했으며 응용 과학과 기술 진보를 방해했다며 이것이 유럽과 중국의 기술 및 산업 시스템 격차를 벌인 가장 큰 이유라고 지목한다. 저자는 "시계 산업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경쟁은 선진국이 가진 기술의 본질이 무엇이며 후진국이 기술 경쟁을 따라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1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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