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엔화 약세에 이끌려 한국 등 아시아 주요국 통화 가치가 줄줄이 동반하락하고 있다. 슈퍼 달러의 영향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 등 일본과 수출경쟁을 벌이는 아시아 주요국들이 엔화 약세에 자극 받아 통화 약세를 방조할 것이라는 관측에 따라 투자자들이 원화와 싱가포르달러화 등의 보유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일부 아시아 통화를 중심으로 엔화와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엔 블록'이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20일 외환시장에 엔·달러 환율은 장중 달러당 118.72엔까지 올라(엔화 가치 하락) 지난 2007년 8월10일 이래 약 7년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앞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경기부진을 이유로 소비세율 인상 시기를 18개월 늦추겠다고 발표하자 일본의 양적완화가 장기간 지속되고 미일 간 금리 차이가 한층 벌어질 것이라는 관측 속에 엔화 약세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엔화 가치는 지난달 31일 일본은행이 추가 양적완화 조치를 내놓은 후 빠르게 낙폭을 키워왔다. 지난달 31일 이후 19일 현재까지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는 5%가량 하락한 상태다.
급속한 엔저 현상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통화 가치도 줄줄이 끌어내리고 있다. 1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엔화 약세가 아시아 외환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역내 주요 통화 보유를 줄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과 수출경쟁을 벌이는 아시아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엔저에 따른 수출경쟁력 약화를 우려해 자국 통화 약세를 용인할 것이라는 관측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말부터 19일 현재까지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3.5% 이상 떨어졌으며 싱가포르달러화와 대만달러화는 각각 1.5%대의 낙폭을 보이는 등 아시아 각국 통화 가치는 엔화에 이끌리듯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일부 이코노미스트들은 일본과 무역 및 투자에 있어 강한 연관성을 갖는 아시아 통화들이 '엔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엔화 약세로 수출시장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한국의 경우 원화와 엔화의 상관관계가 유독 높다. 20일 원화 가치는 달러당 1,115엔대로 진입하며 15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리우시 코발치크 크레디아그리콜 전략가도 "아시아 통화는 엔화 약세로 추가 하락 압력을 받고 있다"며 "특히 한국 원화가 가장 취약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WSJ에 따르면 지난 100일 동안 원화와 엔화의 상관지수는 0.91을 기록했다. 지수가 0이면 두 통화 가치의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1에 달하면 똑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지난달 31일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 조치로 엔화 낙폭에 가속도가 붙은 이래 원화 가치 추이는 엔화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커플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얼라이언스번스타인의 스콧 디마지오 글로벌채권투자디렉터는 "일본은행이 속도를 내면 한국은행도 (수출)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 대응할 수밖에 없다"며 지난 2개월 동안 원화 약세에 베팅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일본 재무성 발표에 따르면 엔화 가치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한 지난달 일본의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9.6% 증가한 7조3,985억엔을 기록했다. 이 기간 일본 수출을 견인한 품목은 자동차와 선박·전자부품·철강 등으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과 겹친다.
태국 등 일본 자금에 대한 투자의존도가 높은 동남아 국가들은 엔저에 따른 외국인직접투자(FDI) 감소로 통화 가치에 타격을 입고 있다. 엔화 약세가 이어지면서 일본 기업들이 외국보다는 국내로 투자를 돌리면 148억달러에 달하는 일본의 아시아 투자가 줄어들고 이는 이들 국가의 통화 약세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이린 청 호주뉴질랜드은행(ANZ) 아시아외환전략가는 태국 등을 사례로 꼽으며 "일본 투자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감안하면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 것도 성장에 부정적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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