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리스크에 골병드는 미 경제
“이번 합의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처럼 파멸을 앞두고 금융위기로 가는 중간역에 정차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마커스 쇼머 파인브릿지인베스트먼트 수석 투자가)
16일(현지시간) 미국 의회의 극적인 막판 협상으로 셧다운(정부폐쇄) 사태와 디폴트 위기가 해소되면서 미국ㆍ아시아 등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도하고 있다. 하지만 셧다운 사태로 가뜩이나 지지부진하던 미 경기 회복세에 금에 간데다 이번 합의안도 미봉책에 그쳐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더 첨예한 예산전쟁이 불붙으며 이른바 ‘워싱턴 리스크’에 미국은 물론 글로벌 경제가 골병이 들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6일간 셧다운 사태에 피해 눈덩이=전문가들은 최근 지속된 셧다운 사태와 디폴트 위기로 미 경기 회복세가 완전히 꺾이지는 않겠지만 4ㆍ4분기 성장률은 대폭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셧다운 사태로 인한 미 경제 피해 규모가 240억달러로 올 4ㆍ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도 0.6%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매크로이코노믹어드바이저도 피해 규모가 120억달러에 이르고 4ㆍ4분기 성장률이 0.3%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셧다운 사태가 고용ㆍ기업실적ㆍ부동산 등 미 경제 전방위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우선 차입 비용이 늘고 수입통관 지연 등으로 일상적인 경영이 지장을 받으면서 기업 실적 악화가 예상되고 있다. 실제 S&P500 기업 가운데 지금까지 3ㆍ4분기 실적을 발표한 105개 기업 중 68개 기업이 4ㆍ4분기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보안업체인 플리어시스템의 앤디 테이크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매출이 당초 예상한 15억~16억달러보다 줄어든 14억5,000만~15억달러에 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비 위축 우려도 높다. 17일 발표된 10월 블룸버그 소비자 심리 지수는 -31을 기록, 지난 2011년 11월 이후 약 2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블룸버그LP의 조셉 브루셀라스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셧다운 사태는 결과적으로 소비자 및 기업 심리에 악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는 올 4분기 소비 및 자본 지출로 나타날 것”이라며 “의회가 미봉책에 불과한 합의안을 내놓음에 따라 소비자 심리는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날 로이터에 따르면 소매업체인 월마트과 코스트코, 군수업체인 록히드마틴과 보잉, 엔지니어링업체인 URS 등 대다수의 제조업체들이 매출 둔화, 감원 등 셧다운 후폭풍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 경기회복을 이끌어온 부동산 시장도 모기지 금리 상승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전날 전미주택건설협회(NAHB)가 발표한 주택시장 지수는 55로 전달의 57에서 하락했다.
◇“내년 초 제2의 리먼 사태 터질라”=더구나 이번 합의안은 미봉책에 그치면서 올해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더 큰 예산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오바마케어 시행 유예, 재정적자 축소 방안 마련 등의 전리품을 얻는 데 실패한 공화당이 이번 합의안을 패배로 규정하고 있어 공세를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퍼베스 위든앤드컴퍼니 글로벌 투자 책임자는 “재정위기의 타임존이 내년 1~2월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짜 문제는 내년’이라는 불안감이 커지면서 소비심리나 기업 투자위축 등도 내년 초까지 이어질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프랑스 전자장비업체인 레그란드의 존 셀도르프 미 지사장은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어떻게 될지 몰라 내년 계획을 짜는 데 신중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이번 합의안이 위기를 지연시켜 오히려 증폭시키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쇼머 투자가는 “지난 2008년 3월 베어스턴스 붕괴 이후에도 여러 정책 판단 오류가 겹치며 결국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이어졌다”며 “이번 합의안은 장기적으로 디폴트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차라리 하루 이틀 디폴트 사태를 맞았으면 미 정치권이 정신을 차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피터슨연구소는 2009년 말 이후 미 정치권이 예산안을 둘러싸고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2012년까지 3년간 미 성장률이 총 0.9%포인트, 매년 0.3%포인트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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