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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슬로건은 다른 기업들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한국도 포지셔닝이 필요합니다."
1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제3회 서울포럼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세계적 마케팅 전문가인 잭 트라우트(사진) 트라우트앤드파트너스 회장은 이같이 단언했다. '내일을 켜세요(Turn on tomorrowㆍ삼성)'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ㆍ현대)' 같은 슬로건에서는 다른 기업들과의 차별점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가 지난 1980년에 주창한 포지셔닝은 소비자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식으로 차별화된 제품의 이미지를 심어줄지를 고민하는 방법론이다.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트라우트 회장의 저서 '포지셔닝'은 '마케팅계의 바이블'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트라우트 회장은 삼성전자가 '리더십'을, 현대차가 '가치'를 활용해 브랜드 이미지를 새로 구축할 때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TVㆍ휴대폰과 기타 가전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데다 소니 등의 경쟁자들이 후퇴하고 있는 만큼 '세계 가전업계의 리더'로 이미지를 굳혀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대자동차 역시 "세계적 수준의 품질을 갖춘 차량을 만드는 기업으로서 '가격 이상의 가치를 가진 차'라는 포지셔닝이 적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볼보가 '안전'을, 벤츠가 '권위'를, 페라리가 '스피드'를 대표하는 것처럼 현대차도 경쟁사들과 차별화되는 가치를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 최근 시장조사기관 JD파워스에 따르면 현대차는 렉서스ㆍ포르셰ㆍ캐딜락에 이어 4번째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다.
트라우트 회장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 기업들의 추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포지셔닝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포지셔닝을 도입하고 있다"며 "베이징에는 심지어 포지셔닝 전략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포지셔닝 훈련학교'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포지셔닝의 과정으로 ▦우선 경쟁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고 ▦어떤 차별점을 내세울 수 있을지 검토한 후 ▦차별점을 증명할 만한 근거와 논리를 만들어 ▦광고와 영업 등 실제 마케팅 전략에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 기업만의 차별점은 소비자에게도 득이 되는 장점이어야 한다는 게 트라우트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포지셔닝 전략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인도 오토바이 제조사인 '바자즈'를 들었다. 바자즈는 '서브 브랜드(Sub brandㆍ하위 브랜드)'와 '엄브렐러 브랜드(Umbrella brandㆍ상위 브랜드)'를 활용해 바자즈만의 포지션을 만들어냈다. 이전까지 평범한 3륜차를 만들었던 바자즈는 우선 서브 브랜드 '펄사(Pulsar)'를 통해 날렵한 스포츠 바이크로 새로운 포지셔닝을 꾀했다.
여기에 또 다른 서브 브랜드 '디스커버(Discover)'로 스포티한 통근용 오토바이까지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오토바이들 사이에서 스타일리시한 디자인을 갖춘 디스커버 바이크는 소비자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펄사는 혼다 등을 제치고 전세계 스포츠 바이크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디스커버는 현재 인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일반 오토바이다.
그 사이 펄사와 디스커버의 엄브렐러 브랜드인 바자즈는 두 서브 브랜드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바자즈는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력으로 파워풀한 엔진을 제조한다는 이미지를 확립했고 이는 소비자들이 펄사와 디스커버 바이크를 보다 믿고 구입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다만 트라우트 회장은 이 같은 성공사례가 흔하지는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75개 카테고리의 다양한 브랜드들을 조사한 결과 그중 21%만이 의미 있는 차별화 포인트를 갖고 있었다"며 "이는 2003년보다 10%포인트나 낮은 수치"라고 지적했다. 기업 세계의 경쟁이 전세계로 확장되면서 한층 치열해졌는데 정작 기업과 광고회사들이 '차별화'보다는 즉각적인 재미와 감성만 담은 광고전략을 펼쳤기 때문이라는 게 트라우트 회장의 분석이다.
그는 무의미한 광고 문구의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 금융권의 은행 광고 문구를 들었다. 예를 들어 '당신을 행복하게만 할 수 있다면(Whatever makes you happy)'이나 '여기 오늘이 있습니다. 내일도 있습니다(Here today. Hear tomorrow)' 같은 문구는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차별화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다른 업계의 '무언가 시작하세요(Start something)' '가능성의 확장(Expanding possibilities)' 같은 슬로건도 '최악'으로 꼽혔다. 트라우트 회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경쟁이 격화된 상황에서 포지셔닝이 모든 계획과 마케팅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편 마케팅 컨설팅업체인 트라우트앤드파트너스는 전세계 13개국에 지사를 두고 AT&TㆍIBMㆍ버거킹ㆍ메릴린치ㆍ제록스ㆍ로터스ㆍ에릭슨ㆍ테트라팩ㆍ렙솔ㆍ휴렛팩커드ㆍP&Gㆍ사우스웨스트항공사 등에 마케팅 전략을 컨설팅하고 있다. 트라우트 대표는 1980년 '포지셔닝' 이외에도 '마케팅전쟁' '마케팅 불변의 법칙' '단순함의 원리'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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