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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캔버스에 화사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네 걸음 떨어져 보면 꽃밭 같던 것이, 두 발짝 앞에서는 붉고 푸른곰팡이처럼 보인다.
"전 원래 사람들이 잘 못 보고 지나가는 것, 구석지고 가려진 것에 관심이 많아요. 뭔가 강한 기운이 후려칠 때 그 옆에 숨어 있어 잘 안 보이는 것,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계속 그림으로 이야기해왔습니다. 이번에는 밤이 되면 햇빛 아래서 볼 수 없던 형태나 색, 실제가 아닌 듯 실제로 보이는 것, 그림자 안에서만 보이는 색, 낮에는 또렷했지만 밤에는 이지러지는 형태죠."
올해로 꼬박 30년 추상회화만을 그려온 도윤희(54·사진) 작가가 16번째 개인전을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고 있다. 밤에 피어오르는 꽃 같은 의미의 '나이트 브로섬(Night Blossom)'이라는 주제로,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한 신작 22점을 내놓았다. 한눈에도 그림이 확 바뀐 것을 느낄 수 있다. 지난 20여 년 줄곧 연필과 바니시 소재를 사용하며 보여준 검푸른 회색 톤은 여전하지만, 색이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물감도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바르고 뭉개고 튀긴다.
23일 서울 평창동 자택 겸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연필·바니시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려 감정이 바로 나오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있었죠. 게다가 한동안 쓰지 않은 색깔을 사용하니, 내 속에서 뭔가 색을 밀어내는 느낌이랄까요. 이번 작업하면서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태어나, 부조리한 세상과 맞서며 긴장감으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조차 생각할 수 없다면 살아내기 힘들지 않을까요?"라며 되물었다.
이번 전시 작품 중 작가가 애착을 갖는 그림은 갤러리 지하층 구석의 갈색과 푸른색으로 구성된 작품'무제(Untitled·YHT-NB-1401)'. 사실 모든 그림에 제목은 없다."꼭 3년 전 베를린 거리에서 푸른 조명 아래 진한 밤색 문을 보며 두 빛의 조화를 잊을 수 없었어요. 그 느낌이 어느 순간 떠올라 빠르게 작업을 마쳤습니다. 새벽이 오는 시간, 햇볕마저 까매지는 그때를 그린 거죠. 전시를 보면서 단 몇 초라도 그 그림 안에서 여행하는, 어떤 장면이 머리에 남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경험을 느끼길 기대합니다."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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