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허(黃河) 일대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황허는 북방 유목민과 남방 농경 중국인의 2,000년 전쟁을 초래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황허의 강물은 티베트 고원에서 시작해 중국 영토로 들어온 후 북쪽 유목ㆍ사막지역으로 나갔다가 다시 농경지역인 중국으로 내려온다. 티베트 고원에서는 맑았던 물이 황토지대를 거치면서 누렇게 변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황허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허는 이후 시안(西安) 부근에서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간다.
황허가 크게 타원형으로 감싸며 돌아 나오는 유목ㆍ사막지역인 오르도스는 북쪽 유목세력과 남쪽 농경세력의 전면전쟁을 불러온 화약고였다. 오르도스 지방은 지금도 한족이 있는 산시성(陝西省) 북부와 내몽골자치구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고대에도 남부는 농경지역, 북부는 유목지역이었다.
발단은 진나라의 팽창욕에서 시작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몽염이라는 장군을 시켜 유목민을 밀어내고 오르도스 지방을 모두 정복하도록 했다. 그리고 유목민의 반격을 막기 위해 황허 북쪽을 따라 장성을 쌓았다. 진나라 장성은 명나라 때 건설된 지금의 만리장성보다 훨씬 위쪽에 있었다.
중국의 이런 공세가 그동안 씨족ㆍ부족별로 분산돼 있던 유목민들을 단결시켰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 외적의 침략을 받은 유목민들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것이 흉노제국이었다. 기원전 2세기 흉노제국의 창업자 묵특을 중심으로 뭉친 유목민들은 한족에 대해 반격을 가하게 되고 이후 2,000년간 장성을 사이에 둔 유목민과 농경민의 전쟁이 이어졌다. 이들 유목민의 후손은 지금의 몽골족으로 남아 있다.
14세기 몽골족의 원나라에서 독립한 한족의 명나라는 장성을 재구축했다. 오르도스 지방의 경우 북부의 유목지역은 포기하고 남부의 농경지역을 지키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그 경계선은 지금의 산시성ㆍ내몽골자치구의 행정구역과 거의 일치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