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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이미 오랑캐에게 빼앗겼음을 모르고 있소?" 송말원초, 나라를 잃은 정사초의 그림 속 난(蘭) 잎사귀는 바싹 마르고, 뿌리는커녕 기댈 땅조차 없다. 산수화에서 이처럼 대상 묘사보다 자신의 뜻에 더 치중하면 심경(心景), 좀 더 사실적인 필치를 더하면 진경(眞景)이 된다. 아예 보이는 대로 그리면 실경(實景)이다. 정사초의 난 그림이나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심경' 산수화가 된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박물관에서 22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석철주(65·사진) 작가는 대표작 '신몽유도원도'를 비롯한 자신의 그림이 좀 더 현실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경'이나 '실경' 산수로 옮겨가고 있다는 얘기. 하지만 화면은 전보다 더 몽롱해지고, 엷은 그물망을 씌운 듯 갈라지는 질감까지 더했다.
"신작 분위기가 더 흐릿해졌어도, 설악산·지리산 같은 실제 모습이 더 구체적으로 표현됐죠. 열여섯에 산수화로 시작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다 결국 돌아온 소재가 자연입니다. 올해로 '신몽유도원도'가 10년째인데, 격자 무늬가 들어간 신작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려 합니다."
대체로 그의 화풍은 5년 주기로 크게 변해왔다. 1985년 '탈춤' 시리즈를 선보이며 등단한 그는 1990년 '독(항아리)' 시리즈로 자신의 존재를 화단에 각인시켰다. 1995년에는 '규방' 시리즈를 선보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항아리·규방 같은 실내 분위기를 벗어나 자연 소재의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5년부터는 대표작인 '신몽유도원도' '들꽃' 시리즈다. '신몽유도원도'는 15년 전 양 무릎 연골 수술을 받아 더 이상 산행이 어려워지자 기억 속 풍경을 재현하기 시작한 작품.
작업 방식도 독특하다.
먼저 캔버스에 바탕으로 짙은 분홍이나 청색 아크릴물감을 칠하고, 다 마르면 다시 흰색을 칠한다. 흰색이 마르기 전 고압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바탕색을 드러내고 맨 붓으로 마무리한다. 짧은 시간에 작업을 마쳐야 하고 덧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수묵화와도 비슷하다고 그는 말한다. 신작에서는 이 그림 표면에 젤을 바른 뒤 그물 같은 질감을 더했고, 일부 그림에는 화면 아래 1/3 정도를 여백처럼 한 가지 색으로 칠해 비워두기도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림을 보고 마음으로 읽는다기보다는 휴대폰으로 찍기 바쁘죠. 그 디지털 사진은 정사각 픽셀(화소)로 구성되는, 확대하면 (그물) 망을 대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죠. 일부 작품 하단의 단색 부분은 동양화의 여백처럼, 관람객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두는 개념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박물관 3개 층에 신작과 그의 대표작을 포함 총 130여 점이 걸렸다. 다작으로 유명한 그답게 1층과 지하에 대부분 올해 그린 신작 50여 점을 선보이고, 3층에는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기별 대표작으로 구성한 80여 점으로 회고전처럼 구성했다. 특히 지하에는 독립공간을 만들어 가로로 긴 창을 내 총 12m에 달하는 '신몽유도원도' 연작이 파노라마 형식으로 내다보인다. 창밖으로 안개 드리운 산을 내려다보는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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