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 패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패션, 빅데이터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18일 열릴 글로벌패션포럼에 앞서 연사와 업종 종사자들이 사전에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쏟아낸 다양한 이야기들 중 가장 큰 줄기는 '빅데이터 전문가 부재'에 아쉬움의 목소리였다.
정보통신기술(ICT)과 다른 산업군과의 교류가 더는 낯설지 않지만 전문가들이 걱정할 만큼 국내 패션과 정보기술(IT) 융합은 유독 행보가 더디다. 한국패션협회에 따르면 국내 패션 기업 중 빅데이터 기반 고객관계관리(CRM) 전담 부서를 갖춘 곳은 20%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마케팅이나 홍보 담당자가 보조 업무로 빅데이터를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빅데이터 관리 업무가 조직 개편이나 인력 수급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영속성 없는 부문이라는 얘기다.
빅데이터 관련 전문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범국가적으로 창조·융합 인재를 강조하지만 패션 업계에는 빅데이터 전문 인력을 배출하는 교육 통로도 없고 이들을 키워 활용하려는 기업들의 의지도 부족하다. 또 많은 기업이 빅데이터 도입과 활용에 드는 초기 투자비용 때문에 변화에 뛰어드는 것을 머뭇거린다.
CEO 혼자만의 직관과 오너십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변수들이 패션 업계에서는 나날이 늘고 있다. 비정형화된 방대한 데이터에서 특정 제품이 소비자의 어떤 욕망과 필요로 소비됐는지 정보를 먼저 캐내는 업체만이 정글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얘이다. 글로벌 패스트패션(SPA) 브랜드 자라는 이미 2012년부터 전세계 매장에서 취합한 소비자 데이터를 상품 수요와 가격 예측에 이용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자라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데이터 분석 능력을 꼽고 있다. 패션업체들이 지금처럼 답보 상태에 머무른다면 빅데이터를 가공·분석해 시장을 점령해가는 해외 패션 브랜드에 언제 안방을 내어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IT와 패션 융합 행보에 최근 조금씩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한국패션협회는 패션 기업 100개 이상이 참여하는 '디지털 패션 테크'를 발족, 빅데이터 상용화 등을 목표로 IT·패션 기업 간 실질적 협업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IT 강국의 진짜 저력을 발휘해 드라마 한류·K팝에 이어 K패션이 성장 먹거리로 부상할 수 있도록 양 부문의 융합 행보에 좀 더 속도를 내야 할 때다.
"앞으로 나의 패션 취향과 소비 스타일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는 패션 매장은 곧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셸 이스라엘이 빅데이터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뱉은 말을 찬찬히 곱씹어 실행에 옮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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