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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앙은행(ECB)이 6일(현지시간) 시장안정을 위해 '무제한 국채매입'이라는 강수를 들고 나오면서 이제 공은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국채매입 프로그램은 사실상 스페인의 구제금융 신청을 의식한 조치인 만큼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가 ECB가 깔아놓은 멍석을 걷어찰 경우 국채매입 프로그램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스페인 정부는 아직까지 구제금융의 손길을 선뜻 잡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이날 ECB 발표 직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자회견을 연 라호이 총리는 "아직 드라기 총재의 발표내용을 보지도 못했다"며 "소식이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언급을 피했다. 그는 다만 더 이상은 스페인의 연금을 깎을 의사가 없다고 밝혀 ECB의 국채매입에 따라올 추가 긴축의 '꼬리표'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스페인이 머지않아 백기를 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 경제전문 매체인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미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이날 고객들에게 배포한 보고서에서 스페인이 오는 13~14일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에 국채매입을 요청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크 슈마허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는 "ECB의 구체적인 국채매입 프로그램이 공개된 만큼 스페인이 14일 열리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무장관회의에서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스페인은 다음달 하순 240억유로에 달하는 대규모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다만 ECB 발표 이후 국채시장에서 스페인의 조달금리가 급락하는 등 시장이 급속도로 진정되고 있어 스페인이 구제금융의 대가로 ECB에서 요구할 엄격한 조건들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버틸 가능성도 있다. 6일 스페인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ECB 조치에 대한 기대감 속에 이날 6.03%까지 하락(국채 가격 상승), 위험수위인 6%대 탈피를 코앞에 두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국채금리가 하락하면서 라호이 총리가 시간을 끌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고 지적했다.
유럽연합(EU)에서는 이 같은 제반상황들을 감안할 때 스페인이 EU 정상회의가 열리는 10월18~19일 무렵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익명의 관계자들을 인용해 프랑스와 EU집행위원회(EC)가 라호이 총리에게 다음달 EU 정상회의 전에 국채매입 지원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치분석가들 사이에서는 라호이 총리가 다음달 21일 바스크와 갈리시아 지방에서 열리는 조기선거 이후로 구제금융 신청을 미룰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문제는 시장이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느냐다. 스피로소버린스트래티지의 니콜라스 스피로 대표는 "스페인이 ECB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받아들일지에 대한 의구심이 프로그램의 신뢰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런던 소재 UBS의 저스틴 나이트 애널리스트는 "이달 말까지 라호이 총리가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다시 우려가 고조되며 스페인 국채금리가 상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장이 스페인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경우 재정위기 확산의 다음 타깃으로 지목되는 이탈리아도 강한 시장의 압박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이번 ECB 지원책이 시장불안을 진정시켜 이탈리아가 직접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게 되는 상황을 기대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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