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2시 서울 종로구 서울노인복지센터 2층 강의실에 어르신들이 모였다. 서울노인복지센터가 8월부터 9주 과정으로 개설한 '영화학교 입문과정' 수업을 받기 위해서다. 초보과정이다. 이날은 11일회째로 스토리보드 작성방법에 대한 교육이 이뤄졌다. 종이에 영화의 촬영장면과 소리ㆍ내용 등을 기록하는 것이다.
스토리보드 용지가 배포되자 일순간 조용해졌다. 각자 그림을 그리거나 대사를 쓰고 혹은 사진을 오려 붙이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강사들은 작성과정을 체크하면서 개별지도에 들어갔다. 곧 코멘트가 쏟아졌다. "5분짜리 단편 스토리보드에 염라대왕과 저승사자가 함께 출연하는데 너무 복잡하지 않은가요. 그냥 저승사자만 둬도 내용전개에 무리가 없을 듯한데 어떤가요." "사무실에서 일하는 장면을 표현하려면 한 공간에 위치한 물건들과 사람들을 정확히 구상해야 합니다."
다음주 수업까지 스토리보드 연습을 마치고 촬영과 녹음ㆍ편집과정을 마치면 소중한 한편의 영화가 탄생하게 된다.
◇어르신들, 영화를 표현도구로 삼다=영화ㆍ영상 제작을 배우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노인복지센터 영화학교 초급과정을 시작한 노인들은 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대부분 자신의 일생 전체나 중요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이날 75세의 김모 할머니는 자신의 영화제목을 '연꽃사랑'으로 잡았다. 결혼과 생활, 자녀의 출산과 성장, 부부의 해로 등을 사진자료를 통해 다큐멘터리 식으로 정리했다. 김 할머니는 "내 일생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초급과정에서는 다소 쉬운 단편 다큐멘터리를 주로 활용한다. 중급 이상으로 가면 극영화를 시작한다. 이날 수업을 진행한 이소현 강사는 "과거에는 다큐멘터리에 그쳤지만 이제는 픽션인 극영화에 도전하는 어르신도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을 비롯해 각지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잇따라 영화학교를 열고 있다. 영화산업이 커지면서 이에 관심을 갖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일까지 열린 제6회 서울노인영화제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노인들이 만든 서툰 영화를 누가 볼까 하는 일부의 편견을 깨듯이 영화가 상영된 500여석의 좌석이 거의 다 메워졌다. 서울노인영화제 주최 측은 이번 행사에 총 3,200여명의 관객이 다녀갔다고 밝혔다.
영화제작에 참여한 개인이나 단체는 훨씬 많다. 이번 6회 행사에는 140편이 출품됐다. 이는 지난 1회 대회의 30편에 비해 5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서울 한복판인 대한극장에서 당당히 열렸다는 것도 영화제의 위상을 알려줬다.
◇노인전용 영화관도 크게 늘어=서대문에 있는 청춘극장은 연일 노인관객으로 만원이다. 하루 3회 정도를 상영하는데 평균 500~600명의 관객이 든다고 한다. 이달에 개봉한 영화는 '아름다운 팔도강산' '파리의 미국인' '로맨스 그레이' 등이다.
서울에만도 노인전용 영화관으로 청춘극장ㆍ허리우드클래식ㆍ명보실버극장 등 크게 세 군데가 있다. 그 외 공공기관에서 부정기적으로 여는 노인 영화관도 적지 않다. 이런 노인전용 극장은 단순히 '극장'에 머물지 않고 노인들의 복합문화공간을 추구하고 있다. 영화상영 외에도 다양한 공연과 문화강좌ㆍ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는 대부분 노인들이 젊었을 때 즐긴 20~40년 전 영화를 틀지만 최근 노인 영화동아리들이 만든 아마추어 영화도 상영기회를 갖고 있다. 노인영화관들이 노인들의 영화 붐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의 영화세계가 계속 이어지기 위해서는 건전한 취미활동으로 남는 것과 함께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노인전용 영화관에서 노인들이 만든 영화의 상업적 상영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함께 영상족보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상업적인 판매가 가능케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광주에서 ㈔광주영상미디어클럽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전양수 감독도 상업적인 면에 눈을 뜬 사람이다. 그는 지난 5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제작지원작에 선정돼 자금을 지원을 받아 만든 영화 '엄마의 반지'를 6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특별상영했다. 60세가 넘어서야 영화를 배웠다는 전 감독은 "영화제작 기법을 바탕으로 다양한 영상홍보물을 만들어 판매하고 미디어자원봉사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영화시장에서 주요 위치에 오르면서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노인이라고 할 때 인식되는 것은 '독거노인' '노인빈곤' '노인자살' 등 부정적인 단어 일색이었다. 하지만 노인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고, 또 관심 있는 영화를 응원하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영화 분야에서는 '노인들의 삶'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서울노인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의 성격이 이것을 반영한다. 대상에는 자유주제 부문에서 '이별을 준비하다(감독 나대순)'가, 노인주제 부문에서는 '123㎞(감독 김미경)'가 각각 선정됐다. '이별을 준비하다'는 15년간 병마와 싸우다 힘겹게 죽은 아내, 그런 아내를 보내고 독거노인이 된 감독이 겪은 상실감이 존엄사와 고독사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는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123㎞'는 50대 딸과 70대 엄마가 옥신각신하며 잃어버린 길을 찾아가는 로드무비 영화다.
서울노인영화제를 주최한 서울노인복지센터의 관장인 희유 스님은 "타자의 시선으로 노인을 말하기보다 어르신 스스로가 보고 있는 세상과 사람ㆍ사랑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 왜곡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다양한 세대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노인들을 위한 영화제작 인프라 필요=노인들이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소수의 부유한 계층의 취미활동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보다 대중화되고 또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금까지는 영화 관련 노인복지라고 하면 싼값이나 공짜로 영화를 틀어주는 정도다. 이 때문에 노인들이 영화를 마음 놓고 제작하고 또 즐기며 어느 정도 수익이 확보되는 사회적 활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인프라의 뒷받침이 절실하다.
그나마 노인전용 영화관에서 여러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 노인들이 놀고 즐기는 사랑방 역할밖에 못하고 있다. 실제로 노인들이 촬영하고 이를 영화화할 수 있는 터전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노인영화제에 입상한 어르신들이 주로 팀 회의를 가진 곳이 다방이었다는 설문도 있다.
노인영화관 등의 시설을 확충해 장비대여와 함께 회의공간ㆍ제작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자금이 부족한 노인들이 영화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실질적으로 돕는 방법이라는 얘기다.
이해욱 우송대 교수는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613만명에 이른 상황에서 정말 곤궁한 입장이 아닌, 보통의 건강한 노인을 위한 복지가 필요해졌다"며 "영화가 이들을 건전한 활동으로 이끄는 무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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