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하나뿐인 아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그것도 쌀 뒤주라는 좁디 좁은 공간에 8일이나 가둬 굶기는 방식으로.
조선 500년사 최악의 왕실 스캔들로 기록된 '임오화변(壬午禍變)', 일명 '사도세자 사건'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수차례 조명됐다. 비극적인 결론 때문만은 아니다. 세자의 아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파기했고 따라서 사건의 진실은 묻혔다. 사료가 없는 역사는 상상을 부추기기 마련. 이야기는 변형에 변형을 거듭해 왔다.
그렇기에 영화 '사도(사진)'를 향한 가장 큰 궁금증은 어떤 해석을 가져왔느냐에 있었다. 뜻밖에도 이준익 감독은 누구나 아는 역사 그대로의 이야기 '정사(正史)'를 택했다. 유료 매체인 영화로서는 위험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사건을 안다고 그 안의 사연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는 감독의 변 또한 설득력이 있었다. 영화는 실록 행간에 숨은 깊숙한 감정들을 불러 스크린에 새김으로써 역사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크게 보여줬다.
영화는 깊은 밤, 세자(유아인)가 울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든 채 아버지 영조(송강호)가 머무는 침전에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경실색한 혜경궁 홍씨(문근영)는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전혜빈)에게 달려가 세손을 포함한 모두가 죽게 됐으니 수를 내달라고 울며 매달린다. 영빈 이씨는 고민 끝에 세자의 행실을 왕에 고하고, 영조는 다음 날 세자를 불러낸다. 세자는 불길한 예감에 "(아버지가 아끼는) 세손이라도 데려갈까"를 묻지만, 아내 홍씨는 고개를 젓는다. "이 상황에도 아들만 생각하다니 당신 참으로 흉한 사람이네."라는 불만을 남긴 채 나선 세자는 바로 그날 쌀 뒤주에 깊이 갇힌다.
그토록 귀애했던 아들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는 왜 이 정도까지 틀어진 걸까. 전개는 한중록 등 기록을 토대로 흐른다. 물론 상상을 가미하거나 일부 변형한 곳도 있지만 무리해서 뒤튼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
기록을 토대로 한 정밀한 해석은 비극의 원인을 선명하고 쉬운 하나의 이유로 몰아가지 않도록 돕는다. 두 사람의 비극은 학문을 사랑했던 영조와 무예가 좋았던 세자의 기질적 차이, 정통성이 부족했던 왕 영조의 뿌리 깊은 콤플렉스, 아버지의 집착과 변덕스러움에 휘둘린 끝에 발현한 세자의 광증, 세자보다 더 뛰어난 왕의 자질을 보인 세손의 존재, 틈만 나면 왕실을 휘두르려 혈안이 된 간신배들, 지나치게 예법에 얽매인 조선 왕실의 상황 등이 모두 맞물려 벌어졌다. 복잡한 원인들을 세심히 녹여낸 것은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이기도 하다. 각자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이 비극적 결말에 도달한다는 이야기 구조는 마치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비장미를 선사한다.
영화가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수 있었던 힘은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아니었다면, 시종일관 괴팍하게 굴어 아들을 광증으로까지 모는 영조가 짧게 내비친 아비의 마음이 관객에 제대로 전달되긴 어려웠으리라. 어린 정조가 눈물 바람으로 달려 나와 아비를 용서해달라 애걸하고, 뒤주에 갇힌 아버지에게 물 한 모금 먹이고자 뛰어다니는 모습에선 도저히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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