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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과 일본 국민 간 왕래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주재 상사원에게 들었던 양국 국민성 차이에 관한 우스갯소리 하나.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한 한국인 청년이 우동집에 들어가 우동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동에 따라 나온 밑반찬이 겨우 단무지 3쪽이었다. 몇 젓가락에 단무지가 떨어졌고 청년은 종업원에게 단무지를 더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인 종업원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단무지는 3쪽이 정량이라 더 줄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청년은 '뭐야 쪼잔한 놈들 같으니'라며 더 주면 덧나느냐는 식으로 따졌고 일본인 종업원은 그 나름대로 원리·원칙만 되뇔 뿐이었다.
화가 난 한국인 청년이 갑자기 호기를 부렸다. "그럼 우동을 더 시키면 될 것 아냐"했고 그렇게 나온 단무지 3쪽마저 금방 자취를 감췄다. 이젠 오기만 남았다. "한 그릇 더!"
종업원은 종업원대로 얼굴이 벌게진 채 추가 주문을 받았고 이제 둘 사이에는 오로지 자존심 싸움만 남게 됐다. 밑반찬을 달라는 대로 갖다 주는 한국의 식당문화와 반찬 한 접시조차 가격이 매겨져 있는 일본 식당문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지만 양국 국민성을 이해하는 데는 매우 요긴한 가르침이었다.
단순히 우동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양국 간 왕래가 아무리 빈번해졌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둘 사이에 완벽한 인식의 공유란 어차피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한일 관계는 이렇게 수위를 관리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서로 '틀림'에만 화를 내며 갈등을 확대하기보다 서로의 '다름'부터 인정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 사회는 지금 '틀림'에만 집착하는 양상이다. 군대위안부와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양쪽 다 유치한 행보를 보이면서 자존심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먼저 군대위안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청구권과 손해배상 문제에 원칙적 해결을 본 문제다. 게다가 1990년대 들어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까지 더 이상 외교 문제화하지 않겠다는 입장까지 밝힌 바 있다. 그것이 일본 사회 스스로에게 책임의식을 일깨우고 결국 고노 담화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원인 무효라는 한국 쪽 주장을 일본 사회는 이해하지 못한다.
독도 문제 역시 일본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인다 한들 사실상 해결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이 독도 문제에 집착할수록 한국인의 증오만 부채질할 뿐이다. 게다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강화될수록 한국인이 대체 무기를 찾을 수밖에 없음을 일본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그 대체 무기가 바로 도덕성이다. 한국 쪽에서 분명 재론하지 않겠다고 했던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삼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외교 갈등의 돌파구를 도덕 문제에서 찾는 '도덕환원주의'의 일환인 셈이다. 일본이 독도 문제에서 물러서지 않는 한 군대위안부 문제 역시 절대로 수위가 낮아질 수 없는 구조다.
양국의 이런 갈등 양상에는 양쪽 언론의 책임도 크다. 비전이 없어서건 용기가 없어서건, 양국의 정치적·지적 엘리트들이 대중의 감정에 맞서는 데 실패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양국 정상은 불에 기름을 끼얹을 게 아니라 논쟁적 사안에서 열기를 식혀갈 의무가 있음에도 그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공통분모로 하는 유일한 나라다. 정치사상과 경제체제를 완벽하게 공유하는 우방인 것이다. 양국 간에 아무리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솔직히 의견을 교환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임해야 하는 까닭이다. lsw1419@sed.co.kr
이신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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