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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12월 2일] 관용의 정치

최근 모 일간지 좌담회에서 '관용의 정치'를 주제로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정기국회 개회 이후 인사청문회ㆍ국정감사ㆍ예산심사로 이어진 빡빡한 일정과 세종시, 4대강 등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현안에 파묻혀 정신 없이 지내오다 정말 오랜만에 한 걸음 밖에서 정치권을 지긋이 바라보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가 인문사회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똘레랑스'는 16세기 초부터 유럽에서 벌어진 신ㆍ구교도 간 적대행위에 대한 반성에서 제기돼 발전된 말로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가 어원이다. 초기에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용인하는 군주의 태도를 의미했으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 특히 볼테르와 루소에 의해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음'을 인지하고 용인하는 것으로 개념이 확장됐다. 즉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 '관용'이다. 정치에서도 여당 강경파가 정당정치를 주도하게 될 경우 야당 강경파가 극한투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여당은 청와대ㆍ정부와 함께 정치적ㆍ정책적으로 정국운영의 주도권 쥔 만큼 그 시절 정치문화의 관용과 불관용의 선택에서도 이니셔티브를 가질 수 있다. 특히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 즉 여당이 점유할 경우 더욱더 그렇다. 이런 구조라면 대통령이 행정부는 물론이고 사실상 입법부ㆍ사법부까지 자기 통제하에 두고 제왕적 권력으로 정치문화를 바꿔갈 수도 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지나는 동안 우리는 지난 권위주의 시대에서 논의 자체가 금기시 됐던 사회적 이슈와 다양한 이익을 표출할 수 있게 됐다. 우리 정치문화에 '관용'이 연약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가능했던 토론과 비판이 사회를 조금은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이 시민문화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당연한 성장통임을, 그리고 어쩌면 민주주의가 기나긴 마라톤 경주를 거쳐 도달해야 할 종착점의 한 풍경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잃어버리고 난 지금에서야 민주주의가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버린 지금에서야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미국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평가받는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집권자는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만 둘러싸이지 않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를 허용하는 일, '관용'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필수 덕목임을 대통령과 여ㆍ야ㆍ언론과 국민 모두가 함께 인정하고 파헤쳐진 '관용'의 연약한 뿌리가 다시 자리를 다지고 일어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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