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결정에도 비교적 평온한 모습을 보였던 신흥국 금융시장이 연초부터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테이퍼링으로 신흥시장에 대한 글로벌 투자심리가 예민해진 가운데 정정불안과 중국 경기둔화라는 악재가 한꺼번에 터졌기 때문이다.
신흥국 종합주가지수격인 MSCI신흥국지수는 올 들어 5거래일(7일 기준) 만에 3.1% 빠졌다. 지난 한해를 통틀어 5% 하락한 것과 비교하면 가파른 내림세다. 미국 내 최대 신흥국 상장지수펀드(ETF)인 FTSE신흥국ETF에서도 최근 3거래일 동안 12억달러가 빠져나갔다.
외환시장의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의 달러 대비 가치가 7일 장중 1만 2,280루피아를 기록하며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8년 11월 이후 최저치를 경신했다. 인도네시아는 이날 달러 표시 10년 만기 국채를 지난해 4월 발행했을 때의 약 2배(가격하락)인 5.95%의 금리로 발행해 자금조달에도 비상등이 들어왔다. 이날 태국과 필리핀의 화폐가치도 3년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남아프리카공화국 환가치 역시 5년3개월 만에 최저를 나타냈다. 터키 리라화 가치는 지난주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한 후 현재 소폭 오른 상태다.
테이퍼링이라는 대형 악재에도 비교적 선방하던 신흥국 금융시장이 연초 들어 크게 요동치는 것은 무엇보다 이 지역 국가들의 정정불안 때문이다. 터키에서는 지난해 말 터진 초대형 부동산개발 비리 스캔들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7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경찰이 집권당 인사 상당수를 비리 혐의로 체포한 데 대한 보복으로 경찰 수백명에게 인사 조치를 취했다. 이에 검찰은 이날 또 다른 비리사건으로 철도청 간부 25명을 체포하며 맞받아쳤다.
태국에서는 반정부시위가 2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다. 반정부시위대는 오는 13일 수도 방콕을 마비시키는 '방콕 셧다운'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많은 투자자들이 현재의 정정불안과 더불어 올해 브라질·인도네시아·인도·터키·남아공의 선거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불확실성이 증폭될 것으로 우려한다"고 전했다.
신흥국 성장엔진격인 중국의 경기둔화도 신흥국 금융시장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 HSBC가 조사한 중국의 지난해 12월 제조업·서비스업 구매자관리지수(PMI)는 각각 50.5, 50.9로 3개월, 2년4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런 가운데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IB)들은 앞다퉈 신흥국 투자 비중을 줄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7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JP모건은 향후 신흥국 채권(자국화폐 표시) 수익률이 지난 10년간 기록한 수익의 10%밖에 안 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고 모건스탠리도 브라질·터키·러시아 화폐가치가 지난해 17% 하락한 데 이어 올해도 약세를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골드만삭스가 "향후 10년간 신흥국 금융시장의 약세가 예상된다"며 신흥국 투자 비중을 3분의1로 줄이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와 관련,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도 7일 보고서에서 "터키 비리사건 수사로 정국혼란이 장기화하면 국가신용등급이 하향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올해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떨어지는 환가치를 붙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줄줄이 인상할 것이라는 관측이 확산되고 있다.
WSJ는 여러 시장 전문가를 인용해 지난해에는 인도와 인도네시아가 금리를 올렸지만 올해는 필리핀·말레이시아 등도 이 대열에 동참해 긴축정책을 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신흥국 주가수익비율(PER)이 미국보다 낮다는 점을 들어 신흥국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신흥국 PER는 10.2로 15.2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보다 낮다. PER는 낮을수록 주가가 상승할 여력이 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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