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게 내세울 만한 경영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인으로서 30년을 살다 보니 확실히 '금융인은 혁명(revolution)적 발상보다 진화(evolution)적 발상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느낍니다." 부실 저축은행들의 무더기 영업정지 여파로 우량 저축은행들도 한동안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박종인(57) 토마토저축은행 총괄부회장을 만나 최근의 사태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30년 금융인으로 외길을 걸어오면서 쌓은 경영철학 등을 들었다. 박 부회장이 첫마디로 던진 '진화론'은 30년 금융인으로서의 경험과 삶의 지식이 함축돼 있었다.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질문에 그는 '선(禪)문답'하듯이 "혁명이나 진화 모두 넓은 의미로는 발전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철학적으로 볼 때 둘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은 "'진화'라는 단어는 본래 '두루마리를 펴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생물학의 용어로 더 잘 알려졌지만 두루마리를 펴듯이 과거의 근거로부터 하나하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진화의 본연의 뜻처럼 금융업도 그렇게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객의 돈을 맡아 관리하고 자산을 키워야 하는 '숙명'을 지닌 금융회사는 리스크를 떠안는 혁명적 접근보다는 답답하더라도 차근차근 리스크를 줄여나가는 진화론적 접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지난 IMF 외환위기 사태와 카드대란에 이어 최근 금융위기까지 금융인으로서 살아오면서 분명히 느낀 것은 '금융업에서 대박은 없다'는 점"이라며 "지난 수세기 동안 금융업은 혁명적인 발상과 변화보다는 조용히 물 흐르듯 안정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현실을 탐구하며 스스로 발전을 가져온 업종"이라고 평가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고 100년 이상 존재한 금융기업은 모두 진화론적인 발상에서 꾸준히 전진해온 기업들이라고 박 부회장은 덧붙였다. 그의 설명에는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게 주된 업무 중 하나인 금융회사로서는 '시류를 따르되 이를 넘어서는 과도한 욕심은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쳇말로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다. "너무 보수적인 게 아니냐"고 다소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최근 유행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특정 소수 계층만이 특정 정보를 갖고 돈과 권력을 소유했다면 이제는 다수가 그에 못지않은 고급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정보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가 성공의 척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한때 국내 대기업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졌던 지식경영시스템도 '한물 가고 있다'고 박 부회장은 평가한다. 그는 "살아 있는 지식이 미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이미 우리 세계에 현실화되고 있다"며 "경쟁력을 갖추고 시장을 이끌기 위해서는 이러한 흐름을 금융회사들이 적극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본적인 금융업 마인드는 보수적일 수 있지만 시스템은 보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어느 산업이든 경쟁에 뒤처지면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하는 '진화론적' 경영철학과도 맥이 닿아 있다. 박 부회장은 "다양한 업종의 사업장이 전세계에서 24시간 돌아가는 현실에서 회사가 일일이 직원들에게 지시하거나 과제를 할당하는 식의 시스템으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며 "토마토저축은행에도 내부 지식과 네트워크 활용을 극대화해 직원들이 살아 있는 정보와 지식을 교류하고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설명했다. 그가 추구하는 리더십이 궁금해졌다. 리더십의 요체에 대해 그는 "조직원의 신망을 얻는 것"이라고 답했다. 박종인식 리더십을 요약하자면 기업의 지속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신망을 얻는 수준도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낮은 수준은 급여를 많이 주고 복지를 잘해주는 단계. 이 방법은 직원들의 신망을 반짝 얻어낼 수 있지만 지속력은 떨어진다. 두 번째는 CEO의 결단력과 솔선수범. 늘 거론되듯 CEO의 자질로 당연히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마지막 단계는 예지력과 준엄함ㆍ포용력이다. 100년을 넘게 운영해온 세계적인 기업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박 부회장은 "리더십의 수많은 정의는 '조직 내 신망'이라는 이 다섯 글자 안에 모두 포함돼 있다"며 "성공적인 기업의 조건은 결국 사람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가 꼽는 CEO의 덕목 중에서도 '사람의 힘'이 가장 으뜸이었다. 평소 박 부회장이 강조하는 리더의 덕목은 '지(知), 행(行), 훈(訓), 용(用), 평(評)'이다. 그는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근무 시절 이건희 회장이 이 다섯 자를 대표적인 CEO 항목으로 꼽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자기 자신이 많이 알아야 하고, 남에게만 시키지 말고 스스로 해야 하며 일을 시키더라도 제대로 시키고, 직원들을 올바로 지도하되 그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풀이하면서 "지금도 이 다섯 자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성공비결에 대해 물었다. "당연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는 "결혼식이 오후2시였는데 사무실에 출근해 오전11시까지 일하고 식장으로 갈 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한마디만 남겼다. 평소 박 부회장은 '직장인 3락(樂)'에 대해 자주 얘기한다. 직장인 3락은 자기가 다니고 싶은 회사에 다니는 것, 같은 직장 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맡는 것, 훌륭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는 "직장인 3락 가운데 세 번째를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후배들이 나중에 상사가 됐을 때 존경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얘기를 반드시 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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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 부실 문제와 관련해 박종인 부회장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때가 때이니만큼 대형 저축은행의 경영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스스로 '채찍질'하는 언급이 그리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저축은행업계 전반적으로 옥석 고르기가 빨리 진행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박 부회장은 "사실 이번 사태가 업게 전반으로 확산돼 우량한 저축은행들까지도 영향을 받아 경영상 큰 타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는 바도 적지 않지만 업계가 먼저 반성해야 할 점이 더 많다"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저축은행들의 옥석이 확실히 가려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 진행되는 저축은행의 커다란 구조조정 흐름에서 부실 저축은행과 우량 저축은행 간 구분이 확실해지면 시장에 살아남는 저축은행이 보다 건전해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단기적으로 혼란스러운 시장상황을 맞이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저축은행들이 '환골탈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야 고객들도 마음 놓고 돈을 맡길 수 있고 업계도 수익창출을 통해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30년 금융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충고였다. 박 부회장은 "저축은행으로 자리를 옮겨보니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퇴직금 등을 예치하고 이자수익을 노후생활의 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러한 점은 서민금융기관으로서 저축은행의 순기능인 만큼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이번 사태가 이른 시일 안에 잘 진정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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