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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1월25일, 영국의회가 입헌법(Constitutional Act of 1791)을 통과시켰다. 골자는 퀘벡 식민지 분리. 오늘날 퀘벡주보다 훨씬 광대했던 당시 퀘벡 식민지를 세인트루이스강 서쪽은 어퍼(upper) 캐나다, 동쪽은 로어(lower) 캐나다로 나눴다. 영국이 세 개로 나뉜 북미 식민지(퀘벡ㆍ노바스코샤ㆍ뉴펀들랜드)를 더욱 쪼갠 배경은 미국 독립전쟁. 영국에 충성하며 독립을 반대했으나 영국의 패배로 설 자리를 잃은 이른바 '충절파 식민지인 10만명 중에서 본국으로 돌아간 부유층과 카리브해의 도서지역으로 이주한 무역업 종사자들을 제외한 4만여명이 캐나다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문제가 생겼다. 프랑스계 주민들과 곳곳에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가 캐나다 지역을 둘러싼 영국과 100년이 넘는 식민지 경쟁에서 패배해 어쩔 수 없이 영국신민이 돼버린 프랑스계 주민들은 가뜩이나 불만이 쌓인 터에 미국이 싫다며 밀려드는 영국계를 경원했다. 난제를 만난 영국의 선택이 퀘벡 식민지 분리다. 영국은 각 식민지에 자치권도 안겨줬다. 프랑스계가 많은 로어 캐나다에서는 독자적인 의회와 자치정부가 구성되고 1774년 퀘벡법에서 인정된 프랑스 민법의 통용과 법에 의한 가톨릭 교회 보호가 재확인됐다. 영국의 지원도 영어권 주민이 많은 어퍼 캐나다에 집중돼 경제력 격차가 더욱 벌어지면서 프랑스계 주민들의 결속력도 갈수록 굳세졌다. 프랑스계는 대외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목숨을 바쳐 싸우면서도 캐나다 연방 자치령이 출범한 1867년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분리독립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퀘벡 분리독립 문제는 1980년과 1995년 두 차례 실시된 주민 찬반투표에서 부결됐으나 표 차이가 근소해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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