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LG카드 사태가 벼랑 끝으로 몰리자 금융 당국은 당시 채권은행 중 하나였던 국민은행에 도움(출자전환)을 요청했다. 하지만 작고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외국인 주주의 의견을 내세워 불가 입장을 밝혔다. 국민·주택 합병을 주도하고 수익성을 전면에 걸며 금융권에 바람몰이를 했던 김 전 행장의 뜻은 완고했다. 당국은 결국 김 전 행장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후 김 전 행장은 정부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고 결국 스톡옵션 문제 등으로 중징계를 받고 불명예스러운 퇴진을 했다.
한번 틀어진 관계, 이를 틈탄 관치의 관행(?)은 독버섯처럼 기승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KB의 권력구조를 늘 견제하고 개입해왔다. KB가 강력한 1인자 시스템으로 운영될 경우 당국의 입김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전직 KB의 한 고위임원은 "주인 없는 금융회사 KB는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국책은행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말했다. KB의 회장과 행장은 그래서 늘 당국의 간섭을 받았고 대부분이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었다.
불행하게도 KB의 경영진은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당국에 관치의 관행을 이어가게 할 수 있는 공간을 줬다.
임영록 전 KB 회장이 금융 당국의 압박을 못 이기고 해임된 것을 두고 금융계에서는 당국과 임 회장과의 전면전을 이 같은 권력구도 프레임에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임 회장의 지나친 1인자 행보가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 임 회장을 끌어내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과 정권 실세와의 연관설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이번 사태에도 어김없이 관치가 무리하게 작동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KB 사태에서 임 회장의 잘못은 명명백백했다. 은행 주전산기 교체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계열사를 통솔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직무정지로까지 상향된 징계 수위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지속됐던 것이 사실이다.
당국 내부에서도 징계 수위를 두고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임 회장을 자연스레 퇴진시키지 못하고 최악의 상황에 다다라서야 완력을 동원하고 말았다. 그 사이에 KB의 구성원들은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시계추를 거꾸로 거슬러 10여년 전의 고압적인 관치금융에서 한발짝도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당국 최고위층조차 "KB 사태를 결국 이런 식으로 매듭지은 것이 부끄럽다"고 말하고 있다.
금융계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처럼 세련되지 못한 관치의 스타일이다.
규제산업인 금융에서 관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쳐도 방식이 너무 후진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금융 당국이 추진 중인 기술금융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의 지시인만큼 당국이 전방위적으로 나서는 것이야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의 기술금융 실적을 '줄 세우기식'으로 보고 받겠다는 당국의 행태는 너무 우악스럽고 투박하다. 당국은 처음에는 매일 실적을 보고 받겠다고 나섰다가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자 결국 주별 보고로 형태를 바꿨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은행의 입장을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 최근 당국의 행보는 마치 고등학교 시험감독관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지난 정권에서의 동북아 금융 허브, 녹색금융, 미소금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권의 코드에 맞추는 금융정책은 정권만 바뀌면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관치금융만 욕할 일은 아니다. 금융회사 수뇌부의 변할 줄 모르는 권력욕은 당국의 개입을 불러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KB만 해도 임 전 회장은 그룹 비중의 80%를 넘게 차지하는 국민은행 은행장을 이사회에서 배제하고 무리하게 일인자 구도를 구축했다. 황영기 전 회장 시절만 해도 KB에서 은행장은 서열 2위의 대우를 받았다. 그랬던 것이 어윤대 회장 전 시절에는 회장-사장-은행장으로 바뀌었다. 임 회장은 여기에 더해 아예 은행장을 지주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허울뿐인 지주가 은행을 무력화시켰으니 뒤탈이 안 날 수 없었다. 지나친 권력욕은 결국 은행장의 반발을 불러왔고 당국에 개입의 여지를 줬다.
KB에서만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4년 전 신한금융에서도 라응찬 전 회장, 신상훈 전 사장, 이백순 전 행장 간의 이전투구식의 권력싸움이 일어났다. 하나금융에서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김승유 전 회장의 입김에 당시 캐피탈 사장이었던 김종준 행장이 잘못된 투자를 하고 당국의 중징계를 받는 사건도 일어났다. 금융계 스스로도 수뇌부가 자정능력을 상실한 모습을 너무 자주 보여줬던 것이다. 금융회사의 한 전직 최고경영자(CEO)는 "당국과 시장의 신뢰는 지난 10여년 동안도 한발짝도 진전된 것이 없는 듯하다"며 "결국 잃어버린 신뢰가 금융산업 자체를 낙후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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