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빌라이제이션 (니얼 퍼거슨 지음, 21세기북스 펴냄)<br>직업윤리 약화 등이 문명 위기 불러<br>정치적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지만<br>"서양 강점·약점 제대로 봐야" 지적
 | 지난 2009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왼쪽) 미국 대통령이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만나 아시아 스타일로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해 화제를 모았다. 니얼 퍼거슨의 새 책은 '서양 우위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진제공=21세기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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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들(civilizationsㆍ2000)'을 펴낸 스페인 지식인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문명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축한다. '나는 개화되었다, 당신의 문화의 일부다, 그는 야만인이다. "
현대 역사를 살펴볼 때 '개화된' 이들은 서양인이고 '문화의 일부'는 세계인이며 '야만인'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 3세계 국가들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의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전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미국은 디폴트 위기를 논하는 상황이 됐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과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역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어 남의 말을 할 처지가 못 된다.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비즈니스 스쿨 교수가 '시빌라이제이션'을 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백년간 '문명'을 형성해 왔던 서양 우위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1500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인구 60만~70만을 자랑하던 베이징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10곳 중에 유럽의 도시는 파리 단 한 곳뿐이었다. 1900년에 상황은 역전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10 곳 중 아시아권은 단 한 곳에 불과하게 됐다. '문명'이 도시를 바탕으로 생성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대 '문명'의 주도권을 서양이 잡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저자는 15세기 이전 동양보다 뒤쳐져있던 서양 문명이 세력을 확장하며 세계 문명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앞으로 서양 우위의 세계가 이어질 수 있을 지를 모색한다. 과거 서양이 패권을 잡은 이유를 알아내야 오늘날 서양의 쇠퇴와 몰락 시점이 얼마나 임박했는지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이 분석한 서양 문명 번영의 원인은 경쟁ㆍ과학ㆍ재산권ㆍ의학ㆍ소비사회ㆍ직업윤리 등 크게 여섯 가지다.
우선 유럽은 정치적으로 분열돼있던 덕분에 한 국가 내에서도 서로 경쟁하는 다수의 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쟁'이 군사, 경제, 무역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발전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가져왔다고 말한다. 여기에 종교개혁은 자연을 합리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17세기부터 수학ㆍ천문학ㆍ물리학ㆍ화학 분야의 주요 혁신은 모두 서유럽에서 일어났고 이는 곧 군사력 강화로 이어졌다. 또 식민지 개척과 영토 확장으로 의학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열대병 연구를 비롯해 공중 보건의 거의 모든 혁신이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종교개혁 이후 근검절약과 성실한 직업활동을 신앙의 표현이라고 본 개신교의 부상은 꾸준히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서양의 비기독교화가 직업윤리의 약화로 연결되며 서양 패권시대의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과학이나 의학 등 다른 요소도 이미 아시아가 서양의 발전 속도를 뛰어넘고 있는 상황이다. 즉, 과거 서양 문명을 형성하게 된 요소들이 더 이상 서양문명을 확장시키는 근본 요소가 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서양 문명의 몰락을 단언하진 않는다. 그는 "진정한 문명은 외부의 영향력이 아무리 거세도 오랜 세월 스스로 지켜냈다"며 서양 문명의 견고함을 지지한다. 오랜 세월 세계를 지배해왔던 서양 문명의 강점과 약점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만 2,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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