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가난. 독립 직후 미국의 모습이다.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서부는 프랑스와 캐나다ㆍ스페인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라가 애팔래치아산맥을 경계로 동부와 서부로 나눠질 뻔한 상황을 이 사람이 앞장 서 막아냈다. 드윗 클린턴(Dewitt Clinton). 뉴욕의 명문가에서 1769년 태어나 연방 상원의원을 거쳐 1804년부터 12년간 뉴욕 시장으로 재임한 클린턴의 가장 큰 치적은 이리운하. 연방정부 예산에 버금가는 700만달러의 공사비가 필요하다는 보고에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100년 후에나 가능할 일’이라며 예산지원을 거부했음에도 클린턴은 밀고 나갔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공채를 발행해 공사를 추진한 클린턴은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인 1817년 7월 첫 삽을 떴다. 584㎞의 운하가 완공된 1825년부터 서부의 경제권은 동부와 합쳐졌다. 밀가루 1톤(가격 40달러)을 버펄로에서 뉴욕시로 보내는 데 운임 120달러와 3주의 시간이 걸렸지만 운하 개통 후 운임이 6달러로 떨어지고 시간도 8일로 짧아졌다. 서부 개척이 촉진되고 시카고와 디트로이트도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통행료 수입만으로 7년 만에 공사비를 뽑은 뉴욕은 미국 최대 도시에서 세계의 중심 도시로 거듭났다. 운하 완공 3년 만인 1828년 2월11일, 그가 주지사 집무실에서 급서(59세)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클린턴이라는 성을 가진 대통령을 보다 일찍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이리운하는 이젠 관광용로 쓰이지만 화물운송의 기능도 일부 유지하고 있다. 대운하를 계획 중인 한국에서도 클린턴 같은 인물이 나오고 치밀한 준비를 거치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좋겠다. 이리운하도 처음 논의가 시작된 지 118년, 타당성 조사가 끝난 지 26년 만에 착공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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