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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새로운 인문학, 힐링서 필링으로


독서모임에서 만난 명선(가명)씨의 얘기다. 명선씨는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이야기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비정규직인 그의 사연은 이렇다. 하루는 사장이 비정규직만 불러 회식을 했단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사장의 발언이다.

사장은 세월호 사태로 단식하고 있는 유민 아빠를 "이혼한 주제에 지금 와서 쇼하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명선씨는 "이혼해도 자식이다. 유민 아빠는 비정규직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양육비도 보탰다."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곳곳에 이견 낼 수 없는 권력관계 많아

이런 자신이 미웠다며 이제 책읽기를 그만둬야겠단다. 인문학 책들은 성찰하고 자기계발에 힘쓰고 불의에 맞서라고 했는데, 책을 안 읽었다면 덜 초라했을 거란다.

나는 국립대 교수다. 최근 대부분의 국립대는 총장직선제가 폐지되고 연봉제가 도입됐다. 대학과 교수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제도지만 대부분의 국립대는 이를 수용했다. 대학예산 지원을 줄이겠다는 정부의 강경한 태도에 도리가 없었다. 비정규직인 명선씨도 확신에 찬 사장에게 어떻게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내 직장에서 그랬듯이 내가 명선씨였더라도 똑같았을 것이다. 명선씨가 아니라 이견을 드러낼 수 없는 권력관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책 말고 명선씨처럼 침묵하는 다수와 함께 문제에 공감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명선씨는 힐링이 됐다며 고마워했다.

명선씨는 인문학에서 왜 도움을 받지 못했을까. 권력·정치·평화·평등처럼 잘 알려진 개념일수록 정의하기 어렵다. 인문학도 학자 수만큼의 정의가 존재한다. 나는 늦게 유학을 다녀와 인문학 열풍을 접했다. 위기의 인문학이 열풍으로 변한 것도 놀라웠지만 힐링만 강조하는 인문학이라는 사실을 우려했다. 고급교양과 사교의 인문학, 더 나은 제품개발의 CEO 인문학, 이 인문학이 나와 나를 둘러싼 공동체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인디언이 말을 타고 질주하다 갑자기 멈춰서 뒤돌아 본다. 왜일까. 자신의 영혼이 쫓아오지 못했을까 봐. 지친 내 영혼을 기다려 위로한다. '힐링(healing)'의 인문학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인디언을 주목해보자. 그는 멈춰섰지만 자신의 말을 쳐다본다. 경주마는 눈가리개를 한다. 이것 때문에 앞만 보고 뛴 것이다. 이 인디언은 눈가리개를 확 벗긴다. 일명 '필링(peeling)'의 인문학이다.

침묵하는 다수와 공감하는 광장 필요

명선씨는 지친 자신을 문제 삼았다. 그런데 사장과 비정규직이라는 권력관계와 이견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문제 삼지 않고 힐링이 될 수 있을까. 필링의 인문학은 앞만 보고 달리게 한 권력관계·계급·자본 등의 본질을 비판하고 성찰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힐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세월호와 윤 일병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인문학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세월호 유가족을 치유하는 데 트라우마센터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 규명 없이 치유될 수 있을까. 윤 일병이 나약했고 윤 일병을 고통에 빠뜨렸던 사병들과 장교들도 나빴다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이제라도 우리 사회는 환부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사람들이 차이가 편안히 드러나는 광장을 가질 수 있는 상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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