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정부의 개각과 관련된 한 일화. 장관 인선발표를 하루 앞두고 청와대 민정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날 발표될 장관 중 한명인 A씨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며 내일 오전 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장관 인선발표는 오후2시. A씨와 한 직장에서 부하직원으로 일했던 이 사람이 청와대 민정실로 찾아온 것은 오전10시였다. A씨가 자신의 부인과 바람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이 직접 자기 입으로 자신의 부인과 바람 났다는 얘기를 했으니 민정실은 난리가 났다. 문제는 시간. 이 같은 내용을 검증할 시간이 없었다. 또 A씨 때문에 이미 예고해 놓은 2시 개각내용 발표를 미룰 수도 없었다. 청와대는 우선 A씨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일화. 외국에서 공부하다 보면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의 행태를 통해 그 나라의 국민성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족보’의 유통경로. 족보란 대학원 등에서 시험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만들어놓은 것으로 과거 시험내용, 정답, 교수별 시험출제 유형 등이 정리된 자료다. 이 자료만 있으면 좋은 성적을 얻기는 ‘식은 죽 먹기’인 셈이다. 중국 학생들은 이 족보를 공유한다. 족보를 구하면 친구들끼리 돌려본다. 물론 중국 친구들끼리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족보는 후배들에게도 전달된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족보를 구하더라도 꽁꽁 숨겨둔 채 혼자만 독점한다. 국가의 구성원은 국민이다. 따라서 국격이란 곧 국민 개개인의 인격ㆍ국민성ㆍ시민의식 수준이다. 한국이 선진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시대변화에 걸맞게 국민의식도 변해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우리나라 사람들의 행태를 꼬집는 데 종종 인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다. 골프장에서도 남이 잘 치면 입으로는 ‘나이스 샷’을 외치지만 속은 쓰리다. 그래서 투서도 난무한다. 물론 올바른 투서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투서도 많다. 남다른 교육열도 그렇다. 옆집 자식이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는 꼴을 참지 못한다. 왜 내 자식이 남보다 못하느냐고 생각한다. 그래서 쉽게 뭉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된다. 이 같은 국민성은 장점도 많다. 모래알이지만 개인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애쓰는 모래알이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잘된 사람을 보면 나도 열심히 해서 반드시 그렇게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잘난 것이 뭐가 있느냐”고 생각한다. 나도 그만한 능력이 있으며 할 수 있다고 느끼고 열심히 일한다. 이 같은 열의가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이다. 과거 개발연대 시대 이 같은 모래알들은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적 어젠다로 통합되면서 세계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일궈냈다. 능력 있는 모래알들이 모였을 때 그만한 성과를 낼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민주화된 후 획일적인 국가비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다원화됐기 때문이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각 분야가 일류가 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국가비전도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며 “우리 국민들은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발전의지가 높기 때문에 이를 담아낼 수 있는 국가의 세부 어젠다와 비전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승’같이 쓰는 풍토 조성 시급=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었든 일단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보면 한수 접고 들어가지만 마음속으로는 존경하지 않는다. ‘어떻게 재수가 좋았겠지’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나도 반드시 그렇게 돼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는 우리의 압축성장에도 원인이 있다.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하려다 보니 각종 편법이 난무했다. 실력보다는 ‘줄’이 중요했다. 수단이 무엇이든 ‘줄’만 잘 잡으면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과거 경제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에게도 축적과정의 비윤리적인 면이 부각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며 “선진국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가는 과도기에 우리가 있는 만큼 정부가 ‘정승같이 쓰는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정책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중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려의 문화를 키워야=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북미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온 사람들은 단순히 그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접 받는다. 반면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 출신들은 서운한 대접을 받기 일쑤다. 우리 국민끼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하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군림과 굴종뿐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05년 국가브랜드 평가 전문기관인 안홀트-GMI가 전세계 35개국을 대상으로 그 나라 국민들의 개방성, 친근감, 외국인에 대한 환영이나 적개심, 배타성 등 국민성을 평가한 결과 우리나라는 하위권인 30위에 머물렀다. 미국에서는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울리면 차들은 모두 길 옆으로 비켜나 잠시 멈춰서야 한다. 앰뷸런스가 가는 방향의 차선뿐 아니라 반대편 차선의 차까지 서야 한다. 일종의 ‘배려’다. 나야 잠시 멈췄다 가는 정도이지만 그 1~2분 때문에 앰뷸런스에 있는 환자는 생사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좀 다르다.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려도 차들이 쉽게 비켜주지 않는다. 앰뷸런스가 알아서 차 사이를 비켜 빠져나가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우리나라의 국민성ㆍ시민의식 수준은 남에 대한 ‘배려의 부족’으로 나타난다. 나만 잘되면 되고 우리 아이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면 된다. 하지만 선진문화란 단순히 경제적 수준의 선진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옆 사람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야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들고 배고프고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간다면 결코 나와 내 아이의 편안한 삶, 안전도 보장 받지 못한다. 이 현대경제연구원 위원은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도 먼저 내가 배려 받은 경험이 많아야 한다”며 “따라서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부모나 윗사람들이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배려는 그만큼 내가 여유가 있고 강하다는 얘기”라며 “우리도 이제는 선진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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