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케인 프로젝트. 마약(cocaineㆍ코카인) 퇴치 프로그램이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자국산업 보호정책의 이름이다. 런던 부시장격인 참사(參事)를 지내던 윌리엄 코케인(1561~1626.10.20)이 주도해 '코케인 참사의 프로젝트(Alderman Cockayne's Project)'로 불리는 이 정책이 노린 대상은 네덜란드. 국왕 제임스 1세를 설득해 직물수출 독점권을 얻은 코케인은 1614년 '백포' 상태의 직물 수출을 금지시켰다. 영국산 반제품이 네덜란드에 수출돼 염색공정을 거친 뒤 두 배의 가격으로 재수입되는 구조를 깨뜨리겠다는 의도에서다. 완제품 면직물에서 염색공정이 차지하는 47%의 부가가치를 국산화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뛰어난 염료생산 기술과 저렴한 비용으로 유럽 면직산업의 염색공정을 독점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보복에 나서 영국산 완제품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격분한 제임스 1세는 절대적 우위라고 믿었던 양모 수출 금지령으로 맞받아쳤다. 황금기를 구가하던 상업대국 네덜란드와 후발주자 영국 간 무역전쟁의 결과는 영국의 참담한 패배. 수출이 3분의1로 격감한 영국은 3년 만에 코케인 프로젝트를 거뒀다. 영국의 도전을 누른 네덜란드의 번영은 계속됐을까. 그 반대다. 제조업보다 마진이 큰 중계무역과 금융에 주력한 탓에 쇠락기로 접어들었다. 반면 영국은 자국산업 보호를 잊지 않고 항해법(1651년) 등을 발동한 끝에 네덜란드를 제쳤다.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네덜란드가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은 네덜란드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선두에 오르려는 영국의 열망은 한국에 절실하다. 일본산 원자재와 핵심부품 의존을 낮추려는 노력이 요즘 잠잠해진 것 같아 아쉽다. 강한 제조업 기반은 국운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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