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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12월24일] 백호주의
입력2004-12-23 17:22:45
수정
2004.12.23 17:22:45
1973년 12월23일, 호주가 신이민정책을 발표한다. ‘인종과 피부색, 국적에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게 골자. 유색인종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백호주의(白濠主義ㆍWhite Australiaism)의 철회다.
콧대 높던 백인들이 이민의 문을 연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받고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아시아시장에 접근하려는 의도에서다. 경제난이 ‘유럽정신의 정수(精髓)’라던 백호주의를 무너뜨린 셈이다.
백호주의의 시발점도 경제적 시기심에 있다. 죄수의 유형지였던 호주대륙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850년의 골드러시부터. 1841년 13만명 남짓했던 인구가 1860년에는 115만명으로 불어날 만큼 금은 사람을 끌어 모았다. 벼락부자가 생겨났다. 특히 5만5,000명이 들어온 중국인들이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백인이 포기한 땅에 한해서만 채금을 허락받았음에도 그들은 금광을 잘도 찾아냈다. 시기와 질투가 따랐다.
마침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1895년 황화론(黃禍論ㆍ아시아인이 유럽문명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황화론이 호주대륙를 휩쓸며 아시아인에 대한 학살도 자행됐다. 연방정부 수립(1901년)되면서 백호주의 이민법도 만들어졌다.
광풍은 외부장벽 마련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인디언 말살보다 더 잔혹한 원주민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다. 11만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백인가정에 강제로 입양시킨 것도 이 무렵이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공식 사과는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와 더불어 악명 높던 인종차별정책인 백호주의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근거 없는 우월의식과 백인중심 사고는 여전하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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