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경기침체를 우려하던 글로벌 투자자들이 이제는 물가를 걱정하고 있다. 몇 달 전까지 미국경제가 어려워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내리면서 달러 약세가 장기화될 것을 걱정하더니만 이젠 미국경제가 회복될 경우를 우려하며 인플레이션이 걱정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국제유가 등 상품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게 그동안의 정서였다. 하지만 지금 미국경제의 지표들이 미약하나마 살아날 조짐을 보이면서 오히려 기름값을 올리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면서 미국처럼 금리를 내리지 못하고 긴축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ECB가 긴축경제를 취할 경우 FRB가 금리를 당분간 동결하더라도 금리 갭에 따른 아비트리지(arbitige)가 커져 달러가 약세로 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달러 약세를 장기화하고 이에 따라 상품가격을 상승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국제유가를 비롯해 상품가격이 일제히 상승하면서 유럽 각국의 인플레이션율은 최근 3%대를 웃돌아 올해 유로화 출범 이후 최고 수준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이 올해 3% 초반, 프랑스가 4%대 가까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 역시 올 1ㆍ4분기 4%대의 상승세를 나타내 이 같은 추세가 연말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9일 발표된 중국의 인플레이션율(PPI 기준)도 8%를 넘어 두자릿수를 향해 치닫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2~3%대의 낮은 물가상승률로 세계적인 물가안정 및 이에 따른 경제성장에 이바지했던 중국의 물가기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이 다시 확인된 셈이다. 일본도 지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2%로 10년 만에 가장 빠른 상승세를 나타내 물가상승 압력이 날로 높아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세계 각국의 물가상승세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국제유가와 원자재 및 곡물가격 상승이 주요인이다. 중국의 4월 원자재 가격은 전년동기 대비 11.8% 올랐으며 원유 출하가격은 37.9%나 급등했다. 또한 중국 내 식료품 가격 역시 전년동기보다 11.9%나 올랐고 산업 기초소재인 대형 철강재와 선재의 공장도 가격도 각각 29.3%와 37%씩 급상승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제유가(두바이유 기준)는 올해 지난해보다 30% 이상, 원자재가격 종합지수는 20% 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아시아 지역은 최근 미얀마의 사이클론 대참사까지 겹쳐 주식인 쌀값 폭등과 함께 이에 따른 식량 파동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인플레이션 태풍에 휩싸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달러 가치 약세도 세계적인 물가불안의 또 다른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 수주간 미국발 금융위기가 진정될 기미를 나타내면서 다소 회복세를 보였던 달러 가치는 각국의 기준금리 동결에 따른 미국과의 금리차 확대 전망으로 다시 약세로 돌아섰다. 9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유로화에 대한 달러 가치는 한때 유로당 1.5284달러까지 상승했으나 ECB의 금리 동결 소식으로 1.5421달러까지 떨어졌다. 달러 가치 하락은 국제 투자자본의 금ㆍ원유 등 실물자산 선호 경향을 확대시켜 해당 자산의 터무니없는 가치상승을 부채질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날 국제유가가 124달러까지 치솟은 것도 산유국들의 정정불안 등 빠듯한 수급상황에다 달러 약세 전망에 따른 대체투자 수요가 급증한 데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RGE모니터의 애널리스트인 라첼 짐바는 “불안정한 경제상황 속에서 원유가 마치 금융자산처럼 인식되고 있다”면서 “달러가 주요 통화에 약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어 유가의 상승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각국 중앙은행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세계경제가 경기침체 압력과 물가상승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어 자칫 어느 한 쪽으로 쏠린 정책에 치중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범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금리인하를 남발하다가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며 반대로 금리인상 등 긴축정책을 선택할 경우는 성장률 하락에 따른 실업증가 등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광범위한 금리정책보다는 감세에 따른 지출 확대 또는 제한적인 유동성 공급 정책으로 최악의 상황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막아보자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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