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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신뢰와 양보의 미덕

한영수 <한국무역협회 전무>

언제나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요즘처럼 신문이나 TV를 보기가 겁난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단 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우울한 내용 일색이다. 미국은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가 수천 명에 달하면서 ‘국가위기론’마저 대두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태풍 ‘탈림’이 대만에 이어 중국대륙을 강타했다. 이에 앞서 이라크에서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성지순례 참사가 빚어졌다. 노동계 '제 몫 챙기기' 심각 이들 대형 참사는 인류에게 닥친 큰 슬픔이지만 후유증 또한 엄청나다는 점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일부 교민사회를 제외하고 우리가 입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다고 하지만 국제유가 폭등세를 더욱 부채질하고 이로 인해 세계경제가 위축된다면 수출로 나라살림을 꾸려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경쟁국보다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요 수출대상국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변고에 더해 국내 노동계의 움직임은 잠재성장률 저하로 고민 중인 우리 경제에 또 다른 악재(惡材)가 되고 있다. 경천동지할 뉴스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해서 그렇지 최근 노사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국내 노동계는 그간 부분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더니 올해 들어서도 예년의 파행을 반복해 사회의 안정을 저해하고 있다. 얼마 전 정부의 긴급 조정권 발동으로 일단 진정되기는 했지만 지난 7월 중순 시작된 항공사노조 파업은 전례 없이 심각한 상처를 남겼고 급기야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ㆍ태평양 지역 부산총회를 무산시킴으로써 국제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지난달 말에는 완성차 업계가 파업에 돌입, 우리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계속된 파업으로 2만2,000여대의 차량을 생산하지 못해 3,1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회사측 발표는 그만두더라도 전·후방 산업에 끼칠 피해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다. 일찍이 세계적 석학인 피터 드러커 교수는 “경제적 크기와 영향력을 감안할 때 자동차 산업은 ‘산업 중의 산업’”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자동차 제조에 앞서 일어나는 소재ㆍ시험연구 및 제조설비 산업과 제조 후의 여객ㆍ화물운송, 자동차 임대 및 정비 등 유통서비스, 기타 정유·보험·금융 등 자동차 산업의 폭 넓은 산업 연관성과 파급효과 때문이다. 완성차 업계의 파업이 걱정스러운 것은 최근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이 난관에 부닥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8월 중 우리나라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8.8% 증가한 235억달러로 역대 8월 실적으로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지만 자동차는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는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5대 수출품목 가운데 7.4%가 줄어든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반도체(18.6%)·무선통신기기(10%)·선박(23.5%)에 비해 크게 뒤지는 수준이다. 올해의 수출 증가세가 세계경제 성장 지속을 전제로 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천재지변으로 인한 주요 선진국 경기 후퇴, 미국 허리케인 피해에 따른 국제유가의 배럴당 100달러대 진입 가능성 고조, 아시아 통화 절상 압력으로 인한 원화환율 하락 등 부정적인 요인이 계속 불거진다면 그간의 수출 호조세를 이어가리라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 2003년 4월 이후 지속해온 무역흑자 기조 유지에도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1914년 8월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끄는 28명의 남극횡단 탐험대는 항해 5개월 만에 얼음바다에 갇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지막 식량으로 비스킷 한 봉지씩을 받았다. 그날 밤, 근심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섀클턴은 한 대원이 슬그머니 일어나 옆에서 자던 동료의 비스킷 봉지를 가져가는 광경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과도한 주장보다는 타협을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 믿고 의지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자기 목숨만 챙기려는 그 대원의 행동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을 꾸짖으려던 섀클턴은 또 한번 놀랐다. 그 대원이 자신의 비스킷을 동료의 봉지에 담더니 조용히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세계경제의 앞날에 조금씩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바람이 점차 거세게 불면서 파도는 높아지고 곧 태풍이라도 불 기세다. 바깥 세상이 이런데도 우리 노동계가 타협을 외면한 채 제 몫 챙기기에 골몰한다면 기업도, 수출도, 나아가 국가경제도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노동계는 과도한 주장을 자제하고 신뢰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함으로써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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