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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일대기-3당 합당부터 서거까지

(3면)YS 일대기-3당 합당부터 서거까지

◇“호랑이 잡으러”…일부 지지세력은 ‘야합’이라며 이탈=추위가 한창이던 1990년 1월 22일,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TV 생중계로 세상에 알려진다. TV에서는 노태우 대통령과 YS, 그리고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손에 손을 잡고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인생 대부분을 독재와 싸우는 데 바친 투사가 군사독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정당과 합당한다는 얘기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에게는 경악할 만한 소식이었다. 집권당이 여소야대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세운 기획에 YS가 협조한 것으로 비쳤다.

이에 YS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군사독재를 끝내기 위해 그 세력이 만든 당에 들어간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일부 지지세력은 ‘야합’이라며 이탈했다. 대표적인 이가 훗날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이다. 훗날 노무현 의원은 “3답 합당은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를 고착시킨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이 구도를 분쇄하는 데 주력했다.

YS는 1990년 7월 민자당 대표가 되지만 최대계파인 ‘민정계’의 압박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YS는 상도동 출신의 ‘민주계’와 함께 마치 거짓말처럼 당내의 저항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기 시작한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문민정부 탄생=민정계는 내각제 합의 비밀각서까지 공개하며 YS를 공격하지만 YS가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가 버리자 노 전 대통령은 정국 파행을 우려해 YS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며 사태를 수습했다. 내각제 포기, YS를 중심으로한 정국 운영 등 모든 상황은 YS에게 유리한 쪽으로 반전됐다.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박철언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강하게 반발해 이를 좌절시켰다. 김윤환 등 민정계 인사를 끌어들이는 등 당을 장악한 뒤 그는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1992년 5월 민자당 대표로 재취임하면서 과거 야당 총재 때와 같이 당을 자신의 1인체제로 재편한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DJ, 그리고 정주영 후보와 격돌한다. 선거운동 기간 YS를 지지하는 부산 지역 기관장들은 한 식당에서 만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는데 이를 정주영 후보 측이 도청해 폭로했다.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 그러나 이는 오히려 YS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아울러 이때 YS는 재벌이 권력을 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됐다고 알려지고 있다.

1992년 12월 18일 YS는 DJ를 193만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된다. 당선증을 들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고 어머니 모쇼에 절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던 소년의 꿈이 이뤄지던 순간이다.

◇지지율 90%의 개혁대통령=YS가 대통령이 된 후 취한 전광석화같은 개혁을 다시 할 수 있는 인물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는 새 행정부를 문민정부라고 이름짓고 한국사회에 누적된 모순과 악습을 일거에 깨뜨리려는 듯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1993년 2월 취임하자마자 하나회를 해체하고 정치군인들을 옷벗겨 군사정변의 싹을 잘랐다. 이때 별이 50개가 떨어졌다는 말이 유행했다.

같은 달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전격 공개하더니 고위 공직자들에게도 이를 요구했다. 5월에는 “문민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선언하고 7월에는 율곡비리 사건을 조사해 관련자를 처벌했다. 8월에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모든 개혁조치가 전격적이어서 구세력은 저항할 시간조차 없었다. 지지율은 90%가 넘었다. 1994년엔 김문수, 이재오 등 노농계 인사를 영입해 민자당에 입당시키며 당 체질 변화도 꾀했다.



김일성 북한 주석과 정상회담하겠다고 발표했지만 7월 김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회담이 무산됐다.

◇역사바로세우기…전·노 구속=집권 3년차인 1995년, YS는 역사바로세우기라는 거대한 계획을 실행한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드러나면서 두 명을 1996년 1월 구속시켰다. 당시까지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세상을 지배했지만 국회를 통해 5·18특별법을 제정, 신군부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YS는 노태우와의 관계를 끊고자 1995년 12월 5일 민주자유당을 해산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광주사태’로 불리던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킨 것도 YS다.

이 시기 YS는 지방 자치 제도를 확대시킨다. 1995년부터는 특별시·광역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등을 직접 선출하게끔 제도를 개정해 이해 7월 전격적으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열렸다.

◇외환위기…영광을 뒤로한 쓸쓸한 퇴임=YS의 레임덕은 1996년말 노동법날치기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여당 의원들을 버스로 집합시켜 심야에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보수 정치인인 JP도 개탄했을 정도였으니 전국에서 노동법 개정에 저항하는 총파업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차남 김현철은 국정 개입 소문이 끊이지 않다 1997년 2월 구속되고 이즈음부터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이 연쇄 파산한다. 무리한 세계화에 직격탄을 맞은 금융시장도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렸고 YS정부는 퇴임을 몇달 앞둔 시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

이회창은 민자당에 단기필마로 들어와 순식간에 당을 장악해 버렸고, YS에게 탈당을 요구한다. YS는 과거의 영광은 모두 무색해졌다. 결국 필생의 라이벌인 DJ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상도동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보수정치의 상징으로=퇴임 이후에는 DJ와 노무현 대통령 세력이 ‘개혁세력’을 표방하면서 YS는 문민 보수정치의 상징이 됐다.

그는 퇴임 후에도 보수정치의 큰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국내 정치에 대해서도 온갖 발언을 다 했다. 국민의정부 시절에는 한 언론에 “정부가 나를 1년 6개월동안 뒷조사했다”며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DJ는 내가 무서워 영국으로 도망친 뒤 은퇴를 번복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충고했다. 노 대통령 탄핵 때는 “잘 돼길 바랐고 충고도 했지만 본인이 소홀히 해 이렇게 됐다”고 냉정하게 반응했다. 이명박정부 때는 2008년에는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됐다며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하다”고 일갈했다.

이런 수위높은 발언을 하면서도 정치적으로 대우를 받은 것은 그가 영남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보수정치의 큰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민주계는 현재도 새누리당 최대계파인 ‘비박계’로 이어지며 YS의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그 대표적 정치인이 다음 대통령을 꿈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맹준호기자 next@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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