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유럽의 한 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친구의 일화가 한국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 적이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연주를 선보인 친구는 그곳 교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교수들은 몇 곡을 더 듣고자 했고 그는 연습해뒀던 다른 두 곡을 마저 연주하고 가능한 레퍼토리가 모두 끝났음을 알렸다. 그런데 그 상황을 교수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상식으로 그만한 연주를 하는 유럽의 음악도라면 스스로 즐기고 마음에 담아두는 레퍼토리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문제유형에 따른 답 도출에 공들이는 입시학원의 공부처럼, 우리는 예술교육마저도 표현의 즐거움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와 성과를 겨냥한 반복 모방훈련으로 일관해왔다는 자각을 새삼 하게 하는 일이었다.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의 부모가 최근 화제가 되면서 나는 그런 우리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우승에 비견하는 꿈같은 일을 실현한 스물한 살 젊은이의 부모는 원하는 것을 하도록 아이를 조용히 도왔을 뿐이라 했다. 예술을 전공하려면 부모의 경제적·시간적인 지원과 적극적인 헌신이 뒷받침돼야 한다지만 최근 국제콩쿠르에 입상하고 있는 다수의 우리 젊은이들은 부모의 '치맛바람'과 거리를 두고 보다 독립적이고 자발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클래식 신세대, 신인류라고 의미를 찾는 언론도 있다.
스스로 배우려는 학습 동기를 고취하는 만큼 효과적인 교육법은 없다. 하지만 배우려는 마음은 "재밌지?" "하고 싶지?" 하며 부추긴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관심이 가고 궁금해지고 생각이 피어오르면서 다가가는 배움의 과정이 스스로 완성되도록 물음을 던지고 기다려주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요사이 우리 교육이 강조하는 도전정신과 자존감은 그 배움의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의 조급한 극성스러움은 아이에게 웬만한 지식과 정보를 빨리 갖추게 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 힘을 길러주지는 못한다. 잠을 자야 키가 크듯 기다려줘야 스스로 생각이 쑥쑥 자란다.
"자, 이렇게 해 봐"하는 선생님을 흉내 내 그럴싸한 결과물의 겉모습을 만드는 데 치중하는 예술교육이 차츰 스스로 질문을 떠올리고 궁리하는 과정으로 진화하고 있다.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우리 젊은 예술가들이 그러한 방법을 외롭게 개인적으로 터득한 성공사례라면 이제는 보다 사회·제도적으로 그러한 교육적 장치 마련을 도모해야 할 때다. 어른이 할 일은 많지 않다. 필요할 때 응답해주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에게 꽤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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