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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일대기-3당 합당 이전

(2면)YS 일대기-3당 합당 이전

(2~3면 아우르는 전문)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삶은 크게 민주화에 인생을 건 투사로서의 시기와 오랜 군사 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문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로 크게 나뉜다.

야당 정치인 시절에는 박정희, 전두환 두 대통령의 온갖 탄압과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야당 당사를 포위한 경찰서장의 따귀를 올려붙일 정도의 ‘투사형 정치인’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과거 군사 정권을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한 뒤 ‘역사 바로세우기’를 명문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할 정도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임기 후반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힘이 빠졌고 아들 김현철 씨의 국정개입으로 내리막길을 걷다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재임 시의 모든 영광을 잃고 퇴임했다. 그러나 그는 퇴임 이후에도 한국 보수정치의 상징으로 남았다. 직접 키운 정치 인재들이 정치권에서 꾸준히 활약하면서 보수 문민세력의 큰 어른으로 생애를 마치게 됐다. 그리고 이번 서거로 YS라는 애칭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과감한 정치인의 별명으로 영원히 남게 됐다.

◇대통령이 꿈이던 부잣집 외아들=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도의 바닷가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홍조 옹은 멸치 어선을 10척 이상 보유했다. 그의 집은 동네에서 꽤 알려진 부잣집이었다.

YS는 어릴 때부터 배짱이 남달랐다고 한다. 일제시기 말 통영중학교에 다니면서도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말을 자주 해 일본인 학생들과 마찰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 후 1945년 경남중학교로 전학해서는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놓았다. 소년의 꿈은 이미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YS는 1947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업에는 큰 뜻이 없었던 듯하다. 대부분의 과목이 B, C, D였다. 대신 2학년때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을 차지,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고 훗날(1951년) YS는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54년에는 자유당 후보로 고향인 거제에 출마해 26세에 최연소로 제3대 국회에 진출한다. 이 최연소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같은 해 YS는 80노인인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박사님, 개헌 하시면 안됩니다”고 진언했지만 결국 이 대통령과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했다. YS는 “이 당은 안되겠다”며 탈당해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길고 긴 야당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결혼은 1951년 고무신 공장집 딸이던 손명순 여사와 했다. 당시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위독하는 소식을 받고 급히 내려갔는데 할아버지는 건강했고, YS의 부친은 맞선을 보라고 했다. 그렇게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차남 현철 씨는 훗날 정치인이 된다.

◇승승장구하는 야당의 젊은 의원=민주당 초기 YS는 신파인 장면을 찾아갔으나 곧 실망하고 구파인 조병옥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1958년에는 중앙당의 권유로 지역을 부산으로 옮겨 출마하지만 석연치 않게 낙선한다. 개표 조작이 의심된다며 법원에 소를 제기했지만 무효였다.

1960년에는 가슴아픈 일을 겪는다. 거제도 고향 집에 무장공비가 침입해 어머니 박부련 여사를 살해한다. 이 일로 인해 YS는 ‘공산주의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군사독재 시절 사상을 의심하는 식의 공격을 받을 때도 “북한 무장간첩에 의해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라며 이를 물리쳤다.

YS는 1960년 8월 민주당이 원내 다수당을 차지하고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에 선출돼 잠시 여당 생활을 했지만 같은해 12월 구파가 탈당해 신민당을 창당하자 신민당으로 옮겨 다시 4개월만에 다시 야당 정치인이 된다. 이듬해 신민당 원내부총무가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소식은 거제에서 들었다. 다른 정치인은 정변 소식에 고향으로 숨기 바빴지만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간 뒤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정치정화법에 손발을 묶이게 된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YS에게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한다. 장면 정권 수립 8개월 만에 정변이 일어났고, 군의 정치참여는 잘못된 생각이니 원래 약속대로 원대복귀하라는 논리였다. 이후에도 군정은 계속해서 참여를 요청했으나 YS는 이를 모조리 거부한다. 이를 시작으로 YS는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과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게 된다.

◇40대 기수론…야당의 거물이 되다=YS가 젊은 나이 야당 지도자이자 거물 정치인이 된 것은 3공화국 시절 나온 ‘40대 기수론’을 계기로 한다. 1969년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의 유진산 당수가 쓰러지자 김대중(DJ), 이승철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젖비린내 난다”는 원로들의 ‘구상유취론’을 물리치고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경선에 나선다.

결국 경선에서 2차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끝에 김대중에게 패하게 되지만 YS는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이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라며 곧바로 승복한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 드문 ‘아름다운 승복’으로 기록됐고 YS의 남자답고 통 큰 성품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회자됐다. 그러나 훗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에는 국민 대다수가 열망하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며 DJ와는 정치적으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군사독재에 대한 목숨 건 투쟁=YS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유신 선포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했지만 가택 연금됐다. 이 무렵 하루 6갑 정도 피우던 담배와 밤새 마시던 술을 끊었다. 연금이 풀리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스크를 착용했는데 그 이유를 “국민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냐”고 설명했다.

YS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정권을 강력 규탄했고 이듬해 신민당의 당수가 된다. 미국에 가서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고 1975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그를 ‘금주의 인물’로 선정했다. YS의 투쟁을 세계가 주목하게 된 것이다.

1975년에는 청와대를 찾아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한 뒤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선거에 이기고도 원내 의석은 3분의 1도 못 갖는 유신체제의 모순과 인권 탄압, 언론 탄압 등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서는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를 위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기 바란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최대의 시련은 1979년에 찾아온다. 가발회사 YH무역의 여공들이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하자 YS는 경찰서장을 빰을 때리며 이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강경 진압 도중 한 명이 추락 사망하자 YS는 “살인정권은 반드시 쓰러진다”고 규탄했고 이는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때부터 정권은 YS를 정치적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후보단일화 실패와 제2야당의 시련=1979년 국회는 여당 단독으로 YS의 의원직 박탈을 의결했다. YS는 또다시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자신은 건재하며 반드시 민주화를 이룩하겠다고 장담한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서거하자 YS가 유신 후반기에 입버릇처럼 했던 유명한 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그 말이 전국에서 회자된다.

독재가 끝난 1980년 봄, 이른바 서울의 봄 정국에서 그는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김종필, 김대중과 경쟁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5월 17일 신군부에 의해 전격적으로 가택연금을 당했고 이에 “국민적 목표를 배신한 5·17 폭거”라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결국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하지 못했다.

1981년에는 민주산악회를 출범시키고 1983년에는 무기한 단식으로 투쟁한다. 1984년에는 이민우, 김대중과 신민당을 창설하고 1987년에는 다시 김대중과 통일민주당을 만들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회복되자 김대중과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김대중은 1987년 11월 끝내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는 민주화를 지지하던 국민의 가슴에 큰 상처를 준 사건으로 역사에 남는다. YS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28%를 득표해 2위를 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YS 세력은 부산, 경남에서만 압승을 거뒀을뿐 수도에서 DJ의 평민당에 패하면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YS의 대권가도는 이것으로 저무는 듯했지만 그는 인생 최대의 정치적 승부수를 감행한다. 한국 정치지형을 영원히 바꾼 사건, 바로 3당합당이다. ★3면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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