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대폭락 1주년을 지난 1930년말 뉴욕에 두 가지 한파가 들이닥쳤다. 하나는 날씨. 예년보다 춥고 눈도 많았다. 다른 한파는 12월 11일 발생한 유나이티드스테이츠(US)은행의 파산. 후자가 몰고 온 결과는 혹독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순식간에 퍼져 세계는 대공황의 혼란에 빠졌다.
‘테이블과 의자만 있으면 은행으로서 훌륭한 조건’이었다는 개척시대의 금융 풍토가 남아 있던 당시 미국에서 은행의 파산은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1929년 10월 주가 대폭락 이후 1년 사이에 망해버린 은행만 1,352개에 이른다.
아무리 은행 설립과 퇴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미국이라도 US은행의 파산은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규모가 컸다. 뉴욕의 네 번째 대형 은행인 US은행의 파산은 미국 건국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은행 파산이었다. 망한 이유는 간단하다. 주가 폭락에 따라 보유 자산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떨어지자 예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것은 모건 등 월가 자본가들의 협조융자 거부. 금융 당국의 종용에도 월가의 큰 손들은 US은행을 외면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순수 민간은행이면서도 국립은행으로 혼동하기 쉬운 거창한 상호를 내세워 시민들을 현혹해온 US은행의 영업행태가 비난 받아온데다 금융황제 모건이 유대계 자본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탓에 US은행은 기댈 곳이 없었다.
화재 진압을 등한시한 월가의 판단 착오는 연쇄도산이라는 대형 화재로 되돌아왔다. 시골 은행이나 망하는 줄 알았던 고객들이 멀쩡한 은행에서도 예금을 빼가는 통에 3년간 8,700여개 은행이 망해버렸다. 마침 후버 대통령이 국내 제조업 보호를 명분으로 경제학계의 반대를 일축하고 ‘공화당의 상비약’인 관세 인상(스무트-홀리관세법)을 단행한 후유증을 앓고 있던 터. 가뜩이나 위축된 무역과 은행 연쇄 파산이 맞물려 불황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미국의 경제사가인 존 스틸 고든에 따르면 불안 심리는 바다를 넘었다. 이듬해 5월 오스트리아에서 위기가 발생해 독일을 거쳐 9월 영국까지 퍼졌다. 견디다 못한 영국은 ‘신용의 상징’이었던 금본위제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위기는 다시 무역축소라는 악순환으로 반복되며 인류는 전 세계 동시불황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US은행의 파산은 공황을 전염병처럼 옮긴 도화선이었던 셈이다. 찰스 킨들버거는 이를 ‘좀처럼 죽지 않는 다년생 풀인 금융 공황이라는 전염병의 국제화’로 봤다.
US은행의 파산은 과거완료형에 머물지 않는다. 에드워드 첸슬러의 저서 ‘금융 투기의 역사’에는 ‘미국 은행시스템 붕괴로 이어진 US은행의 파산은 부동산 담보 대출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부디 US은행 파산이 던졌던 교훈을 새기면 좋겠다. 과도한 부동산 대출과 불안 심리 확산, 감정이 개입된 자금 흐름과 정책 실패가 가져올 위험성에서 오늘의 세상은 예전보다 얼마나 안전할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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