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중심인 作唱, 어깨 무거웠지만 행복
소리선 쓰지않는 음으로 다양한 슬픔 표현
이야기가 곧 소리인 작품으로 기억해주길
"나 어릴 땐 엄마 쉬는 날 있었잖아." 국악인 박애리(사진)의 다섯 살 난 딸은 요즘 바쁜 엄마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로 귀여운 투정을 부리곤 한다. 판소리 알리기에 앞장서며 늘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는 그이지만, 요 몇 달은 '새로운 도전'으로 더 눈코 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아비방연'으로 처음 작창(作唱)에 도전하는 박애리.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는 앞선 공연의 분장도 채 지우지 못한 상태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품속엔 초록빛 표지의 아비방연 대본과 악보가 안겨 있었다. 작창이란 심청가 등 판소리 다섯 바탕의 선율을 기본으로 새로운 전통 소리를 창작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방연은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은 뒤 귀양 간 단종에게 사약을 내릴 때 그 일을 도맡아 한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주인공이다. 강직한 그가 딸을 위해 변절자가 되는 비극을 노래한다. 창극 '메디아'에서 자신의 두 아이를 죽인 여인의 모성애와 한을 풀어냈던 서재형 연출·한아름 작가 콤비, 그리고 메디아 역의 박애리가 작창으로 참여하며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당연히 어깨가 무겁죠. 그러나 꼭 그 무게만큼 행복하기도 해요." 1999년 입단해 16년간 동고동락했던 친정 같은 곳이 바로 국립창극단이다. 서 연출·한 작가의 제안을 박애리는 몇 번이나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큰 영광이죠. 하지만 국립창극단의 창극, 그리고 그 작품의 중심인 작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선뜻 '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방송이나 연극을 통해 몇 분짜리 가요와 공연 대사를 소리로 만드는 일을 해왔지만, 자신의 캐릭터만을 위한 것이 아닌 2시간 분량의 완결된 창극을 위한 작업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부담을 용기로 바꿔준 것은 연출·작가가 건넨 묵직한 믿음이었다. '애리씨가 풀어내는 감성과 소리를 다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줘요.' 어깨가 무거운 만큼 행복한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소리꾼이기에 앞서 엄마이기에 '애끊는 부성'을 다룬 이번 작품이 남다르다. 그는 지난 2011년 유명 댄서 팝핀현준과 결혼해 슬하에 다섯 살 난 딸 '예술이'를 두고 있다. "메디아에 제(메디아)가 '이게 최선'이라라고 말한 뒤 두 자식을 죽이고 한없이 우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부모로서 느낀 감성이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내려놓겠다는 아비방연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소리를 재구성하고 소릿길 안에 사설 얹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풀어낼 수 있게 된 거죠."
박애리는 기존 판소리 음계에서 벗어나는 음악적 실험도 시도한다. 그는 "아비방연은 우는 사람, 원통한 사람이 많은 작품"이라며 "저마다의 다양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반음'처럼 소리에선 잘 쓰지 않는 음도 적극적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의 목을 타고 흐를 '새 소릿길'을 내는 도전. 그 첫 결실은 어떻게 무대에 펼쳐질까. '벌써 매진 회차가 나왔다'는 스태프의 말에 고백 앞둔 소녀처럼 "어떡해"를 연발하던 박애리는 "관객이 '소리가 곧 이야기요 이야기가 곧 소리인 작품'으로 아비방연을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11월 26일~12월 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co.kr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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