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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일생이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정과 인간의 애정이 캔버스에 물감을 문지르는 황홀감과 공존하다가도, 깊이 외길로 빠져들다 보면 가정도 사랑도 혈육마저도 떨쳐버리게 되고 한평생 고독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천경자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
그렇게 황홀과 고독을 넘나들며 살았던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1924~2015·사진) 화백이 영면에 들었다. 향년 91세.
최근 몇 년 사이 '사망설'까지 돌았던 천 화백이 지난 8월 6일 사망했으며 천 화백의 장녀 이혜선 씨가 고인의 유골함을 들고 작품 소장처인 서울시립미술관을 다녀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2일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따르면 장녀 이씨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 93점을 기증받아 관리하는 서울시청 문화정책과를 통해 천 화백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8월 20일 미술관을 방문해 유골함을 들고 수장고와 '천경자 상설전시실'을 다녀갔다. 당시 이씨는 서울시와 미술관 측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외부에 절대 알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대표작 '미인도'가 위작논란에 휘말리자 문제의 작품에 대해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제 자식을 못 알아보는 부모가 있느냐"며 절필을 선언하고 1998년 주요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줄곧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으며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너무 오랫동안 작가의 소식이 들리지 않자 미술계에서는 이미 10여년 전 천 화백이 사망한 것 아니냐는 추측성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씨의 측근은 "천 화백이 지난해 11월 이후 건강이 악화돼 지난 8월 6일 돌아가셨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1924년 전남 고흥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돌연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했다. 일본 유학에서 만난 남편 사이에 남매를 뒀지만 이혼했고, 이후 신문기자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다. 한국전쟁을 겪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도 잃었다. 굴곡진 생을 극복하기 위해 뒤엉킨 뱀들을 화폭에 담아 내놓은 1952년 부산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천경자식 채색 동양화가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린 천 화백은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을 평정했다. 그의 나이 40대 후반에는 타히티 등 해외여행을 다니며 '천경자식 풍물화'를 개척했다.
천경자는 비운의 여인이었으나 미술시장에서는 단연 '여왕'이었다. 경매시장 거래작으로는 2009년 K옥션에 나온 '초원Ⅱ'(105.5×130㎝, 1978년작)가 12억원의 최고가 기록을 갖고 있다. 2007년 11억5,000만원에 낙찰된 1962년작 '원(園)'에 이어 지난 7월에는 수작으로 꼽히는 1989년작 '막은 내리고'가 8억6,000만원에 거래됐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거래된 천 화백의 평균 호당가격은 8,250만원으로 박수근(1억7,800만원)에 이어 두 번째였고, 올 7~9월 미술경매 거래총액도 김환기(39억7,410만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5억9,075만원이었다.
천 화백은 세상을 떠났으나 미술계에서는 아직도 정확한 사망 시기를 두고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장녀 이씨가 서울시에 대해 작품 관리를 문제 삼아 수차례 기증작 반환을 요청한 바 있어 향후 잡음에 대한 우려도 끊이지 않는다. /조상인기자 ccs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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