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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더불어 본격적인 외교의 계절이 시작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다섯 번째 정상회담이 열렸고 뉴욕에서는 160여개국 정상이 유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며 외교전을 펼쳤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세하게 변화한 양국 간 국력의 균형이 포착된다는 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회복세에 있는 경제력과 이란 핵 협상 타결, 미일 동맹 강화 등의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대중 협상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의 공세 외교에 말려들었다는 그간의 비판을 만회하려는 듯 오바마 대통령은 의식적으로 시 주석이 만든 신형대국관계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시 주석은 내수 중심의 구조 조정기에 있는 중국 경제를 언급하면서 경제 발전에 매우 신중하면서도 방어적인 모습을 보였다. 재정 적자에 허덕이며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던 오바마 대통령의 수년 전 모습과 대조적이다. 외교가 국익 실현의 중요한 정책수단이지만 외교가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 힘이 외교를 바탕으로 하는 바는 적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미중 양국은 구체적인 정책 사안들에서 자국 중심의 규범을 정착시키면서 실익을 하나씩 챙겨나가는 방식으로 당분간 양자 관계를 이끌어나갈 것이다. 경제, 기후, 테러, 개도국 지원 및 평화 유지 등 협력 사안에서 양국은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미중의 협력과 경쟁 가운데 한반도 문제가 있다. 양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도발 방지, 북한의 핵 국가 지위 불인정, 통일에 대한 원론적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북한의 병진 전략을 승인하지 않은 셈이다. 현명한 현상 유지 전략이다. 그러나 미중을 비롯한 주변국이 북한 비핵화를 위해 더 많은 제재를 하거나 더 큰 유인책을 제시하려는 전략적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현 상태를 변화시키는 비용이 북한의 비핵화나 한반도 통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중 관계를 협력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가운데 북핵 문제 해결을 넘어 통일을 달성하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국력과 정책수단이다. 단순히 주변 강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만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국익과 외교정책 목표를 실현하려면 이에 걸맞은 수단이 있어야 한다. 현상 유지적인 미중의 현 상태와 북한에 대한 한국의 정책수단을 생각해볼 때 우리의 노력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국력에서 비롯되는 정책수단의 축적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성장동력을 잃고 국방 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외교의 발판이 마련되기란 쉽지 않다. 이제부터는 길게 보고 실무적이고 세부적인 노력을 천천히 쌓아나가야 할 때다. 19세기 유럽에서 난감해 보였던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은 외교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강력한 국방 개혁과 꾸준한 경제 성장, 그리고 효율적인 리더십이 외교에 필요한 정책수단을 만들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통일 기반을 구축하려면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거대 담론 단계를 마감하고 세부적인 방안들을 찾아가야 한다. 정책수단 없이 통일을 바라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변국의 동의도 필수불가결하다. 주변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한국의 통일에 찬성하지만 한국이 스스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가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은 당면한 모든 외교 사안이 미중 간의 전략적 선택의 문제일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버리고 국력을 축적하는 실용적 자세로 주변 강대국 관계에 임해야 한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아시아연구원 안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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