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악필이 대례필간(大樂必易 大禮必簡·위대한 음악은 쉽고 큰 예절은 단순하다).' 중국고전 예기(禮記)의 한 구절이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79·사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 글귀에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일부러 박수 받으려고 하지 마라'는 해석을 덧붙인다. 50여년간 가야금 가락을 연구한 대가는 "국악에서 느끼는 '재미없는 맛'이 기막히게 좋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열린 '인문-예술콘서트 오늘' 강연에서 "좋은 음악이란 곧 쉬운 음악"이라고 강조했다.
명인은 창작국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서울 음대 강사를 맡았던 1962년 명인이 처음 작곡한 '숲'은 국악 사상 첫 현대 가야금 창작곡으로 꼽힌다. 하지만 실제 명인의 처녀작은 그해 미당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를 우리 가곡 형식으로 작곡한 곡이다. 그는 "당시 문학계에 비해 우리 음악은 창조적인 곡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스스로 불만을 갖고 있었고 가곡 대신 기왕이면 전공인 가야금 곡을 써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 후 청록파시인 박두진의 '청산도'를 가야금 연주곡으로 바꿔 작곡한 것이 '숲'이다. 이후로도 국악 대중화·현대화를 향한 시도는 죽 이어졌으며 그중 하나가 1990년대 작곡한 '춘설(春雪)'이다. 전통 12현금보다 음역을 넓힌 개량가야금 17현금을 위한 곡이다. 그는 "원래 입춘을 의미하는 '새봄'이라는 제목으로 만든 것인데 아직 겨울이지만 봄이 옮을 미리 앞당겨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실험정신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고(故) 백남준과도 연을 잇게 했다. 우연히 백남준의 누나가 황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운 것을 계기로 소개 받아 1960년대 말 미국 뉴욕에서 백남준과 처음 만나 창작의 열정을 나눴다. 당시 백남준은 뉴욕 타운홀에서 여성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연주회를 열었는데 무어만의 나체연주와 백남준의 기괴한 전위예술로 인해 뉴욕경찰이 그를 경범죄로 체포하기도 했다. 황 명인은 "뉴욕경찰을 상대로 한 소송비용 마련을 위해 백남준과 함께 연 몇 차례 공연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 물론 나 자신은 옷을 입고 연주했다"며 익살스럽게 회고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연주자로 일제강점기 전설적 가야금 명인 정남희를 뽑았다. 원래 사회주의자인 정남희는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갔지만 그의 산조가락은 황 명인 스승인 김윤덕으로 이어졌다. 명인은 "1990년 국악인으로는 처음 방북해 '평양범민족통일음악회'를 준비하고 정남희 음악을 발굴해 남한 국악에도 접목을 시도했다"며 "7년 후 정남희 음악을 바탕으로 한 '황병기류(流)' 산조곡을 내놨다"고 말했다.
그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삼군가탈수 필부불가탈지야(三軍可奪帥, 匹夫不可奪志也 ·대군의 장수를 빼앗을 수 있지만 비록 보잘것없는 필부라 하더라도 그 의지만은 빼앗을 수 없다)' 구절을 소개했다. 서울법대 재학 시절부터 수백번 읽은 논어처럼 국악 창작의 뜻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의미다. 황 명인은 "논어의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시로 일어나고 예로 서고 음악으로 이룬다)' 구절처럼 공자는 사람이 음악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정도로 음악을 예찬했다"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해야 할 구절"이라고 말했다.
/박현욱기자 hwpar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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