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지만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됐을지도 모른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이 수세로 돌아선 분기점이 소련전선이었으니까.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마크 헤리스 워윅대 교수의 ‘세계 2차대전의 경제학’에 따르면 1939년 전쟁 발발 직전 추축국과 연합국 진영간 경제력(GDP 기준) 차이는 1 대 2.38. 출발부터 불리했던 독일 등 추축국 진영은 1940년에는 이 비율을 1.58까지 낮췄다. 독일에 점령 당한 프랑스의 GDP가 추축국에 합산됐기 때문이다. 경제로 본 히틀러 진영의 도약은 여기가 끝이었다. 추축국과 연합국간 경제력 차이는 1941년을 1.75로 다시 기울어져 종전을 맞이한 1945년에는 5.02로 벌어졌다.
참모들이 한사코 반대하는 데도 히틀러는 왜 인구와 공업생산력을 자랑하던 소련과 전쟁을 벌였을까.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대한 광신 때문이다. 생활권(Living Space)을 뜻한 레벤스라움은 1901년 독일의 지리학자 레첼이 만들어낸 단어. ‘독일 민족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생활권역을 확대해나가야 한다’며 선보인 신조어다.
‘미주 대륙은 신이 백인에게 내려준 선물’이라며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몰아내고 멕시코를 침략한 논리였던 ‘명백한 운명’론(1854년)에 영향 받았다는 레첼의 레벤스라움은 독일민족 정체성 확립과 식민지 확보를 강조한 초기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변태의 과정을 거쳤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저술한 ‘나의 투쟁’에서 동쪽 땅을 구체적인 생활권으로 제시했다. ‘혈통이 깨끗하고 우수한 독일인은 중부유럽에서 우랄산맥까지 지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책에 머물지 않고 국가시책으로 정해진 것은 1935년 11월5일. 베를린에서 군 수뇌부 6명과 비밀회합을 가진 히틀러는 4시간 동안 레벤스라움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실행방안의 결과는 익히 아는 대로다. 2차대전과 제3제국의 몰락. 생활권을 넓히긴커녕 동프로이센의 영토를 잃었다.
레벤스라움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이 부르짖은 ‘대동아공영권’도 레벤스라움과 용어만 다를 뿐 내용은 비슷하다. 일본의 한국 침탈 과정을 지켜본 도쿄 주재 독일 무관 출신의 정치학자이자 외교관·정치인으로 한때 히틀러 다음으로 2인자까지 올랐던 카를 하우스호퍼가 내세웠던 ‘우등민족의 열등민족 지배 당위론’을 히틀러가 부분적으로 베꼈다는 해석도 있다.
100년 전 독일 무관 하우스호퍼가 본대로 한국인은 과연 열등한 민족인가. 과거의 상처를 안고 마주치는 현실은 불안하기만 하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 가운데 영토와 인구를 거의 잃지 않은 일본의 고약한 근성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데도 위안부에서 과거사까지 ‘잊고 미래로 나가자’고 한다. ‘열등’의 유전인자가 망각의 피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