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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백인제 한옥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첫 장면에는 넓은 정원을 갖춘 한옥이 연회장소로 등장한다. 친일파 강인국은 집으로 일본 총독을 초대했다가 암살 위기에 몰리는데 정작 관객들은 화려한 저택의 경관에 탄성을 쏟아냈다는 후문이다. '암살'의 촬영장으로 쓰인 한옥이 바로 북촌 가회동에 자리 잡은 '백인제 가옥'이다. 1913년에 세워진 이곳은 친일파 이완용의 외조카인 한상룡이 일본 고관들을 접대하기 위해 북촌 일대의 한옥 12채를 합쳐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역대 조선총독부 총독과 세도가는 물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를 즐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옥의 주인은 그 후 몇 차례 바뀌어 1944년 백병원 설립자이자 당시 외과수술의 대가였던 백인제 선생에게 넘어왔고 한옥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대지 2,460㎡ 규모로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해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1907년 경성박람회 당시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으로 지을 정도로 당시로는 최고급 가옥이었던 셈이다. 백인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한 여느 한옥과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돼 있으며 일본식 다다미방을 놓고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안채의 일부는 2층으로 지어졌으며 손님접대용으로 독상을 차리던 소반만도 100개를 넘었다고 한다.

과거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내로라하는 권력가들이 살던 대형 한옥 30여채가 있었지만 제대로 보존되지 못해 지금은 백인제 가옥과 윤보선 가옥만 남아 있다. 백인제 가옥이 마침내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새 단장을 하고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그동안 백인제 선생의 부인이 지내오다 2009년 서울시에 매매방식으로 기증해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것이다. 서울시는 시세보다 훨씬 낮은 140억원에 사들여 한때 시장 공관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한다. 우리 근대사의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어낸 고택이 이제야 대중의 곁으로 돌아왔다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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