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왕의 권위가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한 영조가 사도세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어 대를 이어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식교육을 광적으로 간섭하고 사사건건 관리했요. 이른바 성급하고 과도한 조기교육이 부른 비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12일 고덕평생학습관에서 열린 고인돌 강좌 ‘리더를 키우는 교육(부제: 조선의 왕과 사대부의 교육)’ 두 번째 강의를 맡은 노혜경(사진) 덕성여대 연구교수는 ‘사도세자의 비극, 그 원인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고인돌(고전인문학이돌아오다)’은 서울시교육청과 본지부설 백상경제연구원이 공동으로 기획·운영하고 KT가 후원하는 청소년과 시민들을 위한 고전인문 아카데미로 올해 3회째다.
노 교수는 1762년(영조 38년) 임오사변에 대한 비극의 원인에 대한 배경 설명으로 강의를 이어나갔다. “연잉군으로 10여년 궁 밖 생활을 했던 영조는 왕이 된 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평균 세자책봉 나이가 7~8세였는데 15개월 된 아기에게 세자책봉을 하고 영의정 이광좌(소론), 좌의정 김재로(노론)를 직접 스승을 지정하는 등 사도세자에 대한 교육에 과도하게 집착을 보였어요. 전통적으로 세자교육은 시강원이라는 별도 기관에서 프로그램을 짜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게 전통이었지만 영조는 자신이 교재를 만들어서 지시할 정도로 극성이었어요.”
영재기질을 보였던 사도세자는 10세이후부터 영조의 눈에 어긋나기 시작했지만, 영조는 교육을 통한 개조작업을 단행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심지어 동궁관의 세자교육에 대한 효과마저 의심했다는 것. “영조는 세자의 교육을 맡은 스승들의 훈육방식을 직접 나서서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신하들을 압박하고, 한편으로는 사도세자를 불러 스승들이 가르친 내용을 재점검하면서 양측에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던 것이죠. 사도세자에 대한 불신이 심각해지면서 ‘이제 왕 못해먹겠다. 네가 해라’는 식으로 여러 번 선위소동을 벌이기도 했어요. 사도세자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 이해가 되시죠? 나중에는 영조가 불러서 걸어가는 도중에 실신할 정도였어요.”
사도세자의 비극 이후 정조에 대한 영조의 교육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른바 군주로서 사명감을 높이고 학식을 쌓을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으로 눈높이 교육을 시행했다는 것. “기록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죽음에 영조는 반성하는 기미를 찾기 어렵지만, 영조가 남긴 영조어제에는 사도세자가 죽었던 음력 윤 5월에 뻐꾸기가 등장하는 시를 많이 남겼어요. 뻐꾸기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뻐꾸기를 사도세자로 표현했다는 해석도 적지 않아요. 손자의 총명함이 마음에 들었던 영조는 조정의 대소사에 정조를 참석시키고, 체계적으로 교육이 진행될 수 있도록 거리를 두기 시작했죠. 어찌보면 총명하고 뛰어난 어린 세손이 있었기에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비극으로 내몰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저녁 7시에 열린 이날 강의에는 40여명의 수강생들은 사도세자의 비극에 영조의 지나친 영재교육이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했다.
한편, 올해 3회째인 고인돌(고전인문학이돌아오다)은 서울시교육청 도서관 21곳과 서울시 중고등학교 30여 곳에서 12월까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세부 프로그램은 서울시교육청 평생교육포털 에버러닝(everlearning.sen.go.kr)을 참고하면 된다. 강좌는 무료이며 신청은 해당 도서관으로 문의하면 된다./장선화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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