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윤2월9일 새벽 창덕궁 돈화문 앞. 정조가 말에 올라 출발을 명하자 1㎞에 달하는 긴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가는 행차다. 행렬은 숭례문을 거쳐 한강이 흐르는 용산에 도착했다. 강 건너 노량진까지는 배다리(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재를 올려 만든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행차 다섯째 날 화성에서는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500년 조선의 왕실 행사 중 가장 크고 화려한 행사였다. 그는 이튿날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노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뒤 일곱째 날 귀경길에 올랐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행차를 위해 1년을 준비했다. 6,000여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됐을 정도다. 이런 대규모 행사를 벌인 가장 큰 이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재위 24년간 궁궐 밖으로 나간 66회의 행차 가운데 절반이 아버지의 묘소 참배였다. 28세의 나이에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화성행차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혁의 실현이었다. 그는 개혁을 이룰 재력과 군사력이 필요했지만 한양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양은 이미 노론계 기존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답은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이었다. 그가 화성행차를 위해 새로 만든 길(지금의 1번 국도)은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도)상인이 이용한 국가 부흥의 길이었다. 그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고 그 외영(外營)을 화성에 뒀다. 화성행차는 그가 꿈꾼 개혁을 세상에 알리는 거대한 정치 이벤트였다.
서울시가 내년 화성 축성 220주년을 기념해 수원시와 함께 화성행차를 재현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내년 10월 초 열리는 행사에는 창덕궁 출궁의식부터 배다리,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수라상 등이 재현된다. 현대판 화성행차에서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정조의 꿈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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