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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 '국민훈장' 받은 조각가 박은선

고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조각에 '한국의 美' 빚어 달랬죠

조각가 박은선 인터뷰3
조각가 박은선 인터뷰

93년 伊로 가 유럽 거점으로 활동… 각국 市초청 전시 요청 잇달아

이젠 어디서든 유명작가로 인정

인종차별 겪으며 지내온 아이들 "아빠 존경한다"는 말에 큰 자부심

작품 만들다 실패한 것 많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완성

우직함이 내 조각 인생 철칙이죠


예술가가 받는 훈장이라면 '문화훈장'일 텐데 분명 '국민훈장'이라고 했다. 지난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럽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 박은선(50)이 지난달 5일 '국민훈장 석류장'을 가슴에 안았다. 혈혈단신 유럽에서 외롭게,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자랑스럽게,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꾹꾹 참아가며 작업해온 그에게 고국이 달아준 훈장이었다. 예술가로의 업적을 뛰어넘어 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인의 힘을 세계에 널리 보여줬다는 점에 더 큰 무게가 실렸다. 박 작가는 뒤늦게 안 일이지만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박은선 외교'가 회자됐다. 유럽 각지에서 시(市) 초청 전시가 자주 열리다 보니 현지 시장들이 한국 외교관을 만나면 "박은선의 작품을 잘 알고 있다" "박은선 작가를 아느냐"고 인사를 건넨 데서 나온 말이다. 이번에 외교부가 제9회 한인의 날을 맞아 그를 국민훈장 수훈자로 추천하게 된 계기였다.

"처음 이탈리아로 갔을 때는 못 사는 나라에서 일하고 싶어 온 가진 것 없는 동양 놈같이 보였을 겁니다. 어느덧 20년이 넘어 이제는 이탈리아 어디서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성공한 작가라고 인정해줍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조각가가 선망하는 곳에서 초청받아 제 전시가 열릴 때, 그래서 부러움의 눈빛과 칭찬을 받을 때, 그럴 때면 내가 열심히 살았다 싶은 생각이 들어 행복합니다.

아빠의 욕심 때문에 유럽에서 나고 자라 '눈이 작다'는 놀림을 받아가며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속에 살았던 우리 아이들이 존경한다고 얘기해줬을 때 참 뿌듯했습니다. 내가 아이들의 자신감이라는 점, 내가 한국의 자부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참 기쁩니다."

훈장 수훈의 감격과 유럽 활동을 묵묵히 지원해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뒤섞여 아직도 눈가가 촉촉한 박 작가를 그의 작품이 우뚝 솟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에서 만났다. 2013년 개관한 서울관은 비교적 넓은 부지의 외부공간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야외공원에는 조각 작품을 '딱 한 점'만 두고 있다. 바로 박 작가의 작품이다. 미술관이 자리 잡은 경복궁 앞 삼청로에서 북촌 방향으로 꺾어지는 자리, 옛 종친부의 오래된 낮은 담이 사라진 자리를 그의 대리석 조각이 차지했다. 담장 없는 미술관으로 지어진 이곳 특성상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손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이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제목은 '복제의 연속'. 작가는 밝히지 않지만 작품가는 2억원 정도다.

"유럽에서 활동하며 현지산(産) 대리석을 재료로 쓰니 제가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겠지만 사실 작품은 아주 동양적입니다. 선 하나로 여백의 미를 만들어내는 동양화 같다는 평을 듣고는 하는데요. 그저 널찍한 잔디공원일 수 있는 이곳에 제 작품이 기둥처럼 들어서면서 설치된 작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인해 주변 공간을 다시 보게 만들죠. 조각이 넓은 공간에서 힘을 발휘하고 또 그 힘이 공간을 더 확장하는 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입니다."

선 하나를 그음으로써 백지가 여백이 되듯 그의 작품이 들어서면서 빈터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이 같은 매력은 유럽인들에게 참신한 충격으로 다가갔고 현지의 도시들이 앞다퉈 그를 초대해 야외조각전을 열고 싶어하는 이유가 됐다. 지난해 10월 로마 고대유적지 메르카티 디 트라이아노에서 전시했을 때는 "고대 로마 시절부터 계속 있었던 작품인 줄 알았다"는 찬사를 들었다. 도시에 있으면 세련된 조형물로, 숲 속에 놓이면 자연의 일부로 작품들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공간을 보는 새로운 틀을 제공한다.

박은선 조각의 트레이드마크는 깨진 듯 벌어진 대리석의 틈과 두 가지 색의 돌을 교차해 만든 이중 색이다. 그는 작품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분신'이라고 했다.

"조각에서 보이는 균열 같은 틈은 제가 거대한 대리석에 열어준 '숨통'입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이 뚫리며 느껴지는 후련함 같은 숨통은 작품뿐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살아갈 힘을 줍니다. 그리고 깨진 공간 사이로 새로운 빛이 들어오기도 하고요. 두 가지 색을 교차해 쓰는 것은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으로 이중적인 제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색의 돌을 정교하게 자른 뒤 색을 엇갈려가며 다시 한 덩어리로 만드는 해체와 구축의 반복은 다른 색깔의 돌이 하나가 되는 이중성의 교합이자 인간이 추구해야 할 평형성과 균형감각이지요."

'한류'라는 이름으로 K팝과 대중문화·클래식 등이 약진하는 것에 비해 'K아트'로 한국 미술은 부진했던 것이 사실인 만큼 박은선의 활약은 단연 돋보인다. 그는 흔한 외국어 이름 한 번 쓰지 않고 서양인들이 발음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고집했다. 그렇다고 억지스럽게 한국을 내세운 적도 없다.



"예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죠. 맷돌·문살 같은 한국적 요소를 작품에 반영하는 식으로 한국성을 강조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리다운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고 저 또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던 제가 이탈리아로 간 지 23년이 됐다고 한국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한국인입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박은선이 만든 것은 무조건 '메이드 인 코리아'입니다. 어렵게 짜내고 일부러 끼워 맞출 필요없이 내가 만들면 한국의 것이라는 생각과 태도, 그런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요즘 박은선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사국제공항에서 6월부터 그의 전시가 시작돼 오는 2017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빌라기를란다 시립미술관, 바르드 요새박물관 등 이탈리아에서만 올해 5건의 개인전이 열렸고 유럽 최대 조각전인 스위스 바드라가르츠 트리엔날레에 초청됐다. 내년에는 피렌체시의 초청으로 피티궁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피티궁은 메디치가(家)가 살았던 곳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보볼리 정원이 있는 곳이며 헨리 무어 등 세계적 조각가들이 거쳐 간 꿈의 전시장이다. 독일·프랑스·네덜란드·스위스 등 유럽을 누볐고 이제는 미국과 콜롬비아·파나마 등 남미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옛 도공은 도자기를 만들다 실패하면 깨버리고는 했죠. 조각가들도 만들다 실패하는 작품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고 깨 버린 작품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완성하고 말았습니다. '이걸 버리면 내가 나를 버리는 거다'라는 생각으로 남에게 보여주려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나를 만족하게 하는 작업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나에 대한 믿음, 조각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우직함 하나뿐이었습니다."

He is…

△1965년 전남 목포 △1993년 경희대 미술교육(조소 전공) △1997년 이탈리아 카라라국립아카데미 조소과 △2009년 제21회 선미술상 △2012년 이탈리아 포르테데이마르미시 초청전 △2013년 스위스 루가노 도시야외조각전 △2014년 프랑스 라볼 도시야외조각전 △2015년 제9회 세계한인의날 국민훈장 석류장 △2015~2017년 피사국제공항 야외조각전 △2016년 피렌체시 피티궁 개인전 예정



유사 작품 잇달아도 "후배들이 모방할 수 있게 좋은 작품 많이 만들 것"
대가다운 여유 드러내


조상인 기자 ccsi@sed.co.kr

가끔 조각가 박은선은 한국의 지인들에게 '새 작품이 ○○에 설치된 것을 봤다'는 내용의 뜬금없는 축하 메시지를 받고는 한다. 그러나 그중 절반 이상은 박은선의 작품이 아니었다. 명품에 따르는 이른바 '짝퉁'이다. 표절에 따른 저작권 침해를 주장할 만한 사안들이지만 작가는 실제로 자신의 유사 모방작을 보고도 대가다운 여유를 드러냈다.

"괜찮습니다. 누군가 추종하고 따라 하는 이가 많으면 오리지널(원본)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마련이니까요. 미술은 본보기가 있고 그 영향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니 그런 것을 모방이고 모작이라고 못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주로 표절하는 방식은 색깔이 다른 대리석을 엇갈리게 쌓아 올리는 배색 조합이다. 차를 타고 지나며 멀리서 흘끔 보면 비슷해 보일 수도 있으나 가까이서는 차이가 확인된다. 둥근 대리석 덩어리를 포도송이처럼 쌓아 올리거나 꽈배기처럼 꼬인 모양의 기둥을 만드는 식으로 박은선의 작품을 다양하게 참고한 노력이 역력히 드러난다. 박은선의 '진품'은 다른 색의 대리석이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매끈하게 한 덩이인데 모방한 작품들은 이를 엉성하게 따라 할 뿐이다. 대리석의 숨통을 열어준 갈라진 틈과 균열, 정교하게 쌓아올린 조형미와 아우라는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누가 먼저 했는지보다 왜 이것을 했고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더 많은 후배가 모방할 수 있는 기초가 되도록 더 좋은 작업을 많이 해야겠다"고 호방하게 웃었다.

"순수 조각만 파고드는 전업 작가로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여줄 배짱도 없습니까. 유행을 따르면 내 것이 안 되죠. 전 세계의 다른 작가들이 나를 따라오게 할지언정 남을 따라가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한결같습니다."



/조상인기자 ccsi@sed.co.kr·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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