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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재산이 꽤 있는 실버세대 눈치 보기일까 공무원 사회의 '한솥밥 의식' 때문일까.
박근혜 정부의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작업이 표류하고 있다. 지난 2013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소득 중심 부과체계로의 단계적 개편'을 국정과제로 제안한 지 2년10개월이 지나도록 세부 방안들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꾸린 부과체계개선기획단이 올해 초 개편 방안을 담은 활동보고서를 내놓았지만 연말정산 세금폭탄 논란이 커지자 정부안 발표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퇴직자와 저소득 지역가입자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므로 하루빨리 개편해야 한다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새누리당은 전문가를 포함한 당정협의체를 꾸려 개편안의 세부 골격에 대한 공감대를 이뤘다.
그러나 공을 넘겨받은 복지부와 청와대는 협의체 논의 결과를 쉬쉬한 채 시뮬레이션만 거듭하고 있다. 당연히 야당 의원들은 국정감사에서 "건강보험공단에 연간 6,000만건이 넘는 보험료 관련 민원이 쇄도하는데 정부 여당이 구체적인 개편안을 제시하지 않고 늑장만 부리니 19대 국회 임기 내 관련 입법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고 질타했다. 복지부는 종합감사를 하루 앞둔 이달 7일에야 '국민적 수용성과 형평성 제고를 위해 중장기 로드맵 제시를 통한 단계적 개편을 검토'한다는 식의 두루뭉수리한 1쪽짜리 개편 방향 문건과 철 지난 모형별 시뮬레이션 결과를 의원들에게 제출했다. 정진엽 복지부 장관이 8일 국감에서 "(부과체계 개편안을) 연말까지 마련해볼 계획"이라고 답변했지만 복지부 내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하도 다그치니까 노력해보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개편안이 표류하고 있는 것은 어떤 방안을 시행해도 건강보험 재정수지가 연간 5,000억~2조원가량 축나서다. 그러나 원칙과 형평성에 충실하기보다 내년 4·13총선을 앞두고 특정 계층의 표심을 지나치게 의식해 연착륙 방안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많다.
소득·재산이 꽤 있는 직장가입자 피부양자의 무임승차 문제가 대표적이다. 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 올해 1월 건보료 부과자료 등을 토대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연간 개인합산 종합과세소득 2,000만원 초과자 18만5,175명을 피부양자에서 제외하면 이들의 배우자 등을 합쳐 총 31만5,276명(20만1,468세대)이 지역가입자가 돼 건보료를 내야 한다. 18만여명 중 17만명가량은 공무원·국민·군인·사학연금 등 공적연금을 받고 있으며 1인당 평균 연금액이 월 242만원을 웃돈다. 소득의 89%가 연금소득이니 공무원·군인·사립학교 교직원 출신 은퇴자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정부가 퇴직자들의 반발을 우려해 종합소득 4,000만원 초과자만 피부양자에서 제외한다면 대상자가 2,832세대(3,969명)로, 새로 걷힐 건보료가 연간 3,703억원에서 78억원으로 쪼그라든다. 종합소득이 2,000만원을 넘는 20만여세대 중 86%가 2,000만원 초과~4,000만원 이하 구간에 속해 계속 피부양자로 남게 돼서다. 그런데도 연착륙을 명분으로 이쪽에 집착을 보이는데 틈만 나면 재정을 걱정하는 것이 진정성 있는지 의심스럽다. 따박따박 건보료를 내는 연 소득 500만원 이하 지역가입자들을 어떻게 설득할지도 궁금하다.
내년에는 4·13총선이 치러진다. 부과체계 개편안 발표를 자꾸 미루면 연내 법안 처리도 어려워진다. 건보료 부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과 은퇴자들의 고통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은 정책결정자들이 부모나 선배 공무원, 퇴직자들의 압력에 굴복해 꼼수를 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릇된 한솥밥 의식이 새 부과체계의 연착륙 방안이나 실버세대 표심 잡기로 포장돼서는 곤란하다. 형평성을 높이는 것이 국민적 동의를 얻고 건강보험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지름길이다.
/임웅재 노동복지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ael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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