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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생들보다 뒤늦게 은행원 시작…기업여신서 실력 발휘하며 두각
지점장 승진후 성격 완전 뒤바뀌어 깐깐함 벗고 소통의 아이콘으로
KB자산운용 부사장으로 옮긴 뒤 주식 등 전통 투자분야 두루 섭렵
퇴직연금펀드 매년 100% 성장 등 외유내강형 리더십 하나둘 결실
뒤늦은 취업이지만 사실 그는 이토록 오래 KB금융 계열에 몸담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성격이 깐깐해 사교성도 별로 없는데다 학력에 대해 '자격지심'도 있었다.
야간 대학이라도 다녀 '가방끈'을 길게 하고 싶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기를 싫어하는 성격은 그마저도 어렵게 했다. 그는 "야간대학을 다니려면 옆 사람에게 자신의 업무를 맡기고 나와야 했다"며 "대학을 다니려면 은행을 그만두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1978년 국민은행 인천지점에 발령을 받은 그는 행원급이 하기 힘든 고액 수신을 여러 차례 달성하면서 은행장상은 물론 외부기관장상도 수차례 받았다. 1996년 기업분석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민은행은 애초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가계여신(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에 특화된 은행이었다. 기업여신에 대한 비중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국민은행법이 바뀌고 중소기업에 대한 여신 업무를 국민은행에서도 할 수 있게 되면서 이 대표 역시 기업 여신 업무로 눈을 돌리게 됐다.
하지만 국민은행에는 기업 여신을 담당할 사람도 부족했고 시스템도 약했다. 이 대표는 자원을 했다. 해야 할 일이었고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업여신 업무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금융단 연수원 교육이 있으면 윗사람 눈치를 봐가며 참여했고 각종 규정집이나 법률 관련 서적을 샅샅이 뒤졌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특별출연제도를 신용보증기금과 함께 도입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당시 그와 일했던 동료와 선후배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규정집'이라고 불렀다. 이 대표는 "당시에는 고도성장기라 인력이 굉장히 부족할 때였고 공부하러 간다고 하면 못 가게 했다"며 "하지만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욕을 먹더라도 가야 했고 대신 그분들께 미안하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1997년 중소기업금융팀을 거친 뒤 2002년에는 구리기업금융팀 개설준비위원장으로 발령 받으면서 은행원의 꽃인 지점장이 됐다. 그리고 이 인사는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다. 깐깐한 성격과 인간관계가 완전히 바뀌게 됐고 그렇게 이끈 직원들과 '함께' 두각을 나타낸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점장으로 발령 받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냉랭했고 술도 마시지 않아 어울리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며 "만약 지금까지 본점에만 있었다면 성격이나 인간관계 뭐하나 변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회상했다.
기업금융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이 대표는 2008년 국민은행 투자금융본부장직에 오른다. 금융위기 여파로 국내 기업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폭탄이 쌓이는 상황에서 그는 은행 각 지점의 부실 PF를 본부에서 집중관리해 부실을 털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러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역시 그의 끊임없는 준비 자세에서 비롯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에서 PF가 막 등장할 때부터 그는 자산유동화와 PF에 대해 공부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전문가가 돼 있었다.
투자금융본부장 직을 끝으로 그는 국민은행을 떠나 지금의 KB자산운용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섭섭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은행에 입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장은 어렵더라도 부행장까지는 되고 싶은 욕심이 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며 "하지만 기업금융·대체투자에 전문성이 있던 저로서는 KB자산운용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익숙하지 못했던 주식과 채권 등 전통적인 투자자산 분야는 직원들과 본부장의 조언을 들었다. 그는 "부사장으로 지냈던 1년 반 정도의 기간이 너무 소중했다"며 "직원들이 진실하게 해주는 조언이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대표는 '덕장(德將)'이다. 직원들 앞에서 그들을 끌고 나가기보다 그들과 함께 나가기를 원했고 그것이 맞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가 직원이었을 때도 하나부터 열까지 확인하는 상사보다 나를 믿고 일을 맡기는 상사에게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며 "제가 실수하면 저뿐만 아니라 상사도 다치게 되니 그랬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장이 되면서 많은 부분을 본부장들에게 일임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그는 본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거나 조율이 되지 않을 때 중재를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는 "제게 어떻게 할지를 묻지 말고 왜 이렇게 결정했는지를 설명해달라고 한다"며 "수평적으로 대하는 것이 훨씬 더 의사결정이 빠르고 올바른 답을 찾아낸다"고 말했다.
그가 KB자산운용을 맡은 지 2년여. 그의 리더십이 하나씩 결실을 맺고 있다. 지난해 핵심 경영 전략으로 내세웠던 채권혼합형펀드의 수탁액은 1년 동안 3조원이나 늘었다. 퇴직연금펀드도 매년 100% 가까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캐나다와 일본 등 선진국 인프라에 투자하는 대체투자펀드도 본궤도에 올랐다. 그리고 국민은행에 의존했던 판매 채널도 다양해졌다.
그는 "KB자산운용의 지난해 성과를 국민은행이라는 '메가뱅크' 덕분이라고 폄훼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말이 가장 기분 나쁘다"며 "우리 직원들이 보여준 그동안의 성과를 투자자들이 믿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올해로 60세를 맞는 '원숭이띠'인 이 대표지만 여전히 부하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린다. 느즈막한 밤이라도 자신을 찾는 전화가 오면 뛰어나간다.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이 고맙기 때문이다. 그동안 뒷바라지해준 부인에게 미안해 올해 개인적인 목표를 '건강'으로 삼았다는 이 대표. 올해도 후배들과 직원들이 부르면 달려가겠느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가지 않겠어요? 오늘 그 사람이 나를 찾았다고 해서 내일도 찾으라는 법이 없는데 내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가야죠."
이 대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산다.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늘 겸손하라고 말한다. 그는 "겸손한 게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상대방의 실수에 대해서도 '갑'의 입장에서 다그치기보다는 겸손하게 대하면 그만큼의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희권(사진) KB자산운용 대표는 웃음이 많다. 미소 띤 그의 얼굴은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하고 어떤 말이라도 귀담아 들어줄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 대표는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이다. 40년 가까이 KB금융 계열에 재직하면서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듯 새로운 일에 도전했고 성과를 내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왔다.
이 대표는 학창시절 깡마른 체구에 세상일에는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학생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학업에도 그리 충실하지 못했고 그래서 친구들보다 취업도 늦었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던 국민은행 입사는 우연처럼 다가왔다. 원래 이 대표의 꿈은 '교사'였다. 군을 제대한 뒤 도서관에 틀어박혀 사범대에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우연찮게 옆자리 선배가 국민은행 원서를 쓰는 것을 보고 원서를 얻어 지원한 것이 30년 가까운 '은행맨'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 대표는 "당시 기업은행에도 합격을 했는데 부모님이 국민은행보다 기업은행에 취업하라고 했다"며 "그때까지도 반골기질이 남아 있어 부모님의 뜻과는 달리 국민은행을 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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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 등 고객 맞춤형 솔루션 제공… 해외 액티브펀드 라인업도 강화 KB자산운용 새해 목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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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기자 junpark@sed.co.kr
사진=송은석기자 songthomas@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