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마시는 술은 삿된 기운 물리쳐
과거 우리나라는 시절(時節)마다 해먹는 음식이 매우 다양했다. 특히 술은 세시풍속에 따라 종류가 많았다. 정월 초하루인 설날에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고 하는데, 이 세주에는 도소주가 많이 쓰였다. 도소주는 독한 소주(燒酒)가 아니라 도(屠)는 ‘잡다’, 소(蘇)는 ‘삿된 기운’을 뜻하는 것으로, 마시면 괴질을 물리치고 일 년 내내 사기(邪氣)를 없애 준다고 믿는 술이다.
도소주(屠蘇酒)는 ‘대황, 길경 등의 약재를 붉은 주머니에 싸서 우물 속에 넣었다가 정월 초하루 새벽에 꺼내어 술을 넣어 잠깐 끓인 것을 동쪽으로 향하여 마신다’는 동의보감 기록이 있다. 차게 식혀 마시는데 약재에서 우러나는 자양강장 효과도 무시할 수 없거니와 이렇게까지 정성을 몹시 드리면 공동체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술잔 속엔 음양오행의 사상 담겨
무엇보다 입춘을 지난 설은 음중음(陰中陰), 겨울을 넘기고 봄을 원초적인 모습 그대로 맞이하는 시절이다. 이러한 때 새벽은 그야말로 밝는 해의 기운이 절묘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때와 방향을 가려 빚는 술, 우리의 술잔 속에는 음양오행을 비롯한 동양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몇 해 전 영화 ‘취화선’을 보면 조선의 천재화가 오원(吾園) 장승업이 나온다. 오원의 제자로서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의 그림 중에 도소주와 관련된 것이 있다.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라는 그림이 그것이다. ‘탑원’에서 열린 ‘도소회’이라는 뜻이다. 탑원은 심전의 친구인 독립운동가 위창(葦滄) 오세창의 집을 가리킨다. 오세창은 자신의 집에서 탑골공원의 원각사 백탑(白塔)이 잘 보여 당호를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망국의 비분강개도 한잔 술과 함께
1912년 정월 초하루 밤에 도소주를 마시며 열렸던 이 도소회에는 오세창 외에 훗날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이 함께 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1912년은 나라를 빼앗기고 1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니, 이들이 모여 비분강개하며 밤새 나누었을 이야기를 짐작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 이 부분 인용 및 출처: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244쪽, 주영하 지음, 사계절, 2012)
그보다 1세기 반 앞서, 1760년대 후반에는 이 백탑 주변에서 낡은 제도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일단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박지원을 비롯하여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을 주장하던 북학파 실학자들이 주동이 되어 ‘백탑시사(白塔詩社)’라는 모임이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원각사의 흰색 탑 주변에 거주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일명 ‘백탑파’라고 불렸다.
#새역사의 동력이 될 도소주 한잔을
정조(正祖) 사후, 박제가, 유득공, 홍대용 등 북학파를 위시한 당대 기라성 같은 실학자들의 원대했던 꿈은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가 했지만, 그들의 개혁인자는 지금껏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나라를 빼앗긴 후 백성들은 더 이상 어떠한 꿈도 가질 수 없는가 했지만, 오세창 등은 도소회를 열고 7년 뒤인 1919년 그 자리 백탑에 기어이 다시 서서 3·1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설 명절이 지나면 곧 3·1절이 다가온다. 그리고 4월에는 총선이다. 보수와 진보 어느 쪽에서든 합리적이고 건강한 개혁세력들이 나타나 주기를 바란다. 백성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고, 살만한 나라로 만들고자 했던 ‘백탑의 꿈’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 혹시 고뇌에 찬 출마예정자들이 있다면, 혹시 마음 깊이 바른 정치를 염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이 땅의 평화가 어떻게 온 것이며, 지금 이 나라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할지 새겨주기를 바란다. 정월 초하루 날, 뜨겁게 마신 그대들의 도소주 한 잔이 역사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게.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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