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0억달러. 한중 수교 이후 지난해 말까지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거둔 무역수지 누적흑자다. 연평균 204억달러. 중국과 1국 2체제인 홍콩까지 더하면 금액은 더욱 늘어난다. 홍콩의 중국 반환(1997) 직후인 1998년부터 누적흑자액이 3,152억달러. 둘을 합치면 8,062억달러에 이른다. 연평균 322억달러 흑자다.
반대로 구조적인 적자 요인도 있다. 바로 일본이다.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후 우리의 무역수지 누적 적자는 5,363억달러. 한중수교 이후부터는 4,626억달러 적자다. 해마다 193억달러씩 적자를 봤다. 일본과 장사해 밑진 금액을 중국에서 벌충했다는 얘기가 된다.
왜 이런 비교를 하는가. 흑자 기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에 강력 반발하는 중국이 경제 보복에 나설 경우 우리 경제는 시련이 불가피하다. 중국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는 최근 '한국은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중국이 당장 경제 제재를 취할지는 의문이지만 작은 제스처 하나로도 우리 경제는 흔들릴 수 있다. '한국 여행에 대한 행정지도'만 해도 명동과 신촌·제주도의 상권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캄캄한 전망이 사드 하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연말 한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45일간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더욱 높아졌고 한반도의 긴장은 냉전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경제도 어둡다. 일본만 이를 드러내고 웃는 형국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달 보름 새에 우리에게 일어났는가. 시계를 돌려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지난해 12월28일. 두 번 놀랐고 큰 낙심에 빠졌다.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 소식의 내용에 경악했다. 도대체 받아낸 것이 무엇인가. 더 놀라운 점은 정부의 태도다. 역대 어느 정부도 못한 일을 해냈다니. 역대 어느 정부도 안 하던 일을 저지르고는 업적으로 포장하는 뻔뻔함에 기가 막힌다.
낙심한 대목은 국론의 분열이다. 한국의 이념 갈등이 아무리 심해도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일본에 대한 감정은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는 가치였다. 정부의 합의 발표와 셀프 칭찬 이후 위안부 할머니들을 '매춘부'로 몰아세우는 극우의 논리가 버젓이 고개를 드는 판이니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일본에서 연일 딴소리와 망언이 나온다. 교과서 왜곡도 심해졌다. 정작 우리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다.
일본과 대화 내용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군색한 한일협상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부는 해가 바뀌면서 기가 살아났다. 이번에도 북한이 도와줬다. 북한이 지난 1월6일 기습적으로 핵실험을 강행한 후 모든 게 바뀌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금기로 여겨져 이명박 정부도 거둬들였던 일본과 군사협력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웃을 수밖에.
북한이 장거리 로켓(미사일)을 전격 발사한 뒤에는 더 힘이 붙어 사드 배치 논의 역시 전격적으로 튀어나왔다. 사드나 한미일 군사동맹 역시 역대 정부가 하지 않았던 사안이라는 점에서 위안부 협상과 맥락이 같다. 역대 정부는 바보였나. 못해서 못한 게 아니다. 국가 이익을 따져보고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보호막을 둘러왔건만 현 정부는 스스로 깨버렸다.
사회적 합의와 이견 수렴 과정의 생략과 무시는 개성공단 완전 중지에서도 되풀이됐다. 주지하듯이 개성공단은 전 세계에서 인건비가 가장 싼 곳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통일대박'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징검다리 성격도 갖고 있다. 개성공단에서 4년간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개성공단 같은 곳이 20~30개 더 생긴다면 한강의 기적이 재현돼 고성장을 구가할 수 있다'고 말한 김진향 KAIST 미래전략대학원 교수의 충고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경제 피해는 공장주들 몫만이 아니다. 국내 내의류의 90%를 생산한다는 개성공단이 멈추면 가격 상승도 불 보듯 뻔하다. 개성공단 때문에 후방으로 물러났던 북한군 2개 사단이 재배치되면 긴장도 그만큼 높아지기 마련이다. 개성공단이라는 경제 영토를 증오의 대결장으로 만든 셈이다.
정부의 지금 행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금융위기 수준인 18.5% 감소를 기록한 지난달 수출 실적에서 보듯이 경제가 흔들리는 판국에 중국의 경제 제재 가능성에 개성공단 완전 중단까지 줄줄이 악재뿐이다. 정녕 경제는 덜 중요한가. 암울하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